
일상

건강한 AI 활용법
AI를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글을 쓸 때 100% AI에만 의존한다면 지적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AI를 유료 구독해가며 써본 결과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보았다.
먼저, 글을 쓸 때는 글의 시작과 마무리, 그리고 다 쓴 글을 마지막으로 다듬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글의 시작과 마무리 또한 AI의 추천을 완전히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AI의 글을 보고 나름대로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내 입맛에 맞게, 내 색깔이 드러나게 다시 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다 쓴 글을 다듬는 정도로 AI를 사용한다면 더 좋은 글의 흐름과 단어 선택을 AI로부터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오히려 AI를 제대로 사용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요즘 유행하는 바이브 코딩을 할 때의 건강한 사용법 기준 또한 생각해보았다. AI에게 일을 시켜놓으면 해당 작업이 완료되는 동안 사람은 직접적인 코딩 관련해서 할 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 빈 시간동안 유튜브를 보거나 다른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의 작업에 대한 몰입이 깨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고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이전 작업물을 둘러보며 다음에 AI에게 내릴 작업들의 목록을 세워본다. 이렇게 하고 나서는 창의력이 발휘되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이건 비단 코딩뿐만 아니라 AI로 어떤 작업물을 만드는 모든 경우에 통용된다. 요즘 AI로 PPT나 PDF, 이미지를 만들어야 할 때도 많은데, 이런 경우에는 AI가 생성한 내용들의 진위여부를 비판적으로 따져보고 글을 나의 입맛에 맞게 수정하려는 인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때도 AI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다양한 프롬프트와 다양한 AI로부터 아이디어를 제공받아도 시원찮은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내 스스로 융합하여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보라는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를 거의 경험한 적이 없다. AI는 도구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몸소 이해할 수 있었다.
Central Dogma 공부법
오늘 central dogma 공부하다가 내가 하고 있는 공부법이 유전자 표현 과정인 central dogma와 아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DNA에서 transcription이 일어나서 pre-mRNA가 만들어지고, RNA Processing을 통해 intron을 걸러낸다. 그리고 modify된 mRNA가 세포질로 나와 ribosome을 통해 translation되면서 polypeptide가 만들어지고, 그것들을 통해 protein이 만들어진다.
내 공부법도 비슷하다. 책(DNA)에서 먼저 전체적으로 러프하게 개념을 옮겨적는다(pre-mRNA). 이때 100% 이해하거나 암기한 상태가 아니라 이런게 있구나 정도로 체크한다. 이후 해당 노트를 보면서 다른 정리 노트에 깔끔하게 정리한다. 이때도 100% 이해하거나 암기한 상태는 아니지만 합칠 내용은 합치고, 날려도 지장없는 내용은 날리면서(intron) 매우 밀도 있는 나만의 개념서를 만든다(mRNA). 이후 AI나 각종 다른 서적을 통해(ribosome) 개념 상 어려운 부분이나 논리 상 빈 부분들을 채워넣고, 다시 한 번 새 노트에 최종 정리한다(polypeptide). 이때 나만의 논리흐름이나 문장 선택으로 나에게 맞게 내용을 personalize하면서 이해는 100%, 암기는 아직 덜 된 상태이다(transla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테스트를 해보면서 개념에서 나아가 실전적인 익히기에 들어간다(post-translational modification to make functional protein).
의료화(medicalization)
어디까지가 개인의 개성이고 어디까지가 의료적 취급의 대상인가
이름
이름의 착각은 두려운 것이다.
특별한 이름에 신나서 이 정도면 되었다, 만족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인생에서 이름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높은 자리
높은 자리는 권력으로 꼬장부리는 자리가 아니라 더 잘 베풀 수 있는 자리다.
새 소리
으레 그렇듯 군대는 자연 친화적인 곳에 위치한다. 산과 숲이 많은 곳, 그래서 벌레도 많은 곳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이 싫어졌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릴 때는 자연을 생각하면 싱그럽고 쾌청한 이미지가 떠올렸다. 맨발로 자연을 거닐며, 아무 걱정 없이 노닐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으로서의 자연이었다. 아마 각종 도서와 영상 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자연이 대체로 그러하였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한 듯하다.
하지만 점점 자연이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맨발로 다니다가는 상처가 나고 온갖 감염병에 걸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닿기만 해도 몸이 붓는 식물들, 나를 노리고 달려드는 온갖 벌레들. 어느새 나는 유튜브에서 들리는 새소리에 싱그러움을 느끼고 실제 자연 속 새소리에는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군대에서 일하다 새 소리를 듣고
편견은 그 사람의 세상이다
편견은 그 사람의 세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편견이 강해지는 느낌을 받는다면 자기 주변 환경이 오랫동안 바뀌지 않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경험이 늘어날수록 편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 알게 된다.
요즘 들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과 같은 편견을 두고 빅데이터니, 확률이니 하며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편견에 부합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긴 시간을 살아가면서 편견에 따르는 행동 한 번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그 사람이 편견에 부합하는 사람일 확률보다는 높을 듯하다.
요즘 따라 편견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짧게 썼다.
10인의 법칙: 무연관 소수 공격자에 의한 시스템 붕괴 이론에 대한 종합 분석
아래의 글은 당직 근무를 설 때 떠올라 정리한 생각을 기반으로 AI에게 보고서를 써달라고 한 내용의 전문이다.
1. 이론의 개요
10인의 법칙은 서로 아무런 조직적·이념적·인적 연관이 없는 10명의 개인이 각자 독립적으로 동일한 유형의 시스템을 반복 공격할 경우, 어떤 사회 시스템이라도 지속 불가능해진다는 명제이다.
이 이론이 조직화된 테러리즘 담론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공격자들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상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직도, 이념도, 후원자도, 상호 인지도, 심지어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식도 없다. 각자는 자신의 이유로,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시점에 공격을 실행한다. 이 이론에서 "10명"은 조율의 산물이 아니라 집계의 산물이다.
시스템의 범위는 축구경기와 같은 미시적 사회 관행부터 국가라는 정치체(政治體), 나아가 인류라는 종(種) 전체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 이론의 핵심 메커니즘은 반복성 × 무연관성 × 누적 피로이다.
축구경기의 예시는 이 논리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한 명의 폭탄테러범이 경기장을 공격한다. 경기는 중단되지만 한 달 뒤 재개된다.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개인들에 의해 이어진다. 열 번째에 이르면, 아무리 보안을 강화해도, 아무리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축구경기라는 관행은 실질적으로 지속 불가능해진다. 관중은 오지 않고, 선수는 뛰지 않으며, 방송사는 중계를 포기한다. 국가 단위에서는 정치인 암살의 무연관 연쇄가 정치 참여 자체를 붕괴시킨다는 것으로 확장된다.
본 보고서는 이 이론을 세 개의 축(우위성·실현 가능성·필연성)에서 분석하며, 최종적으로 이 이론이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시효 임박한 사회적 궤도로 이해되어야 함을 논한다.
2. 왜 이 이론이 조직 테러 이론보다 강한가
전통적 테러리즘 연구는 조직화된 집단(IRA, ETA, 알카에다 등)을 주 대상으로 하며, 이들의 정치적 실패 사례를 근거로 "테러는 대체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Max Abrahms, 2006)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10인의 법칙은 이 실패 논거의 세 축을 모두 우회한다.
첫째, 조달·조직화 병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직 테러의 결정적 취약점은 자금·훈련·정보라는 인프라의 유지 필요성이며, 정보기관이 침투하고 자금 흐름을 차단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러나 무연관 개인은 조달되지 않는다. 그들은 인구의 기저율(base rate)에서 저절로 발생한다. 어떤 정보기관도 조직되지 않은 것을 침투할 수 없다.
둘째, 결집 효과(rally-around-the-flag)가 약하게 작동한다. 결집은 식별 가능한 적(敵)을 전제로 한다. IRA는 아일랜드 민족주의라는 식별 가능한 정체성이 있었고, 알카에다는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이념적 좌표가 있었다. 그러나 서로 무관한 개인 10명에게는 결집시킬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이 사회 그 자체, "정신질환", "현대성의 무엇인가"라는 추상으로 흩어진다. 이 조건에서는 방어적 결속 대신 회피와 위축이 지배적 반응이 된다.
셋째, 조율 없이도 궤도가 형성된다. 조직 테러는 조율을 통해 힘을 얻지만, 조율은 노출 지점이기도 하다. 무연관 개인들은 조율이 없기에 노출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개별 행동은 시스템에 대한 집합적 압력으로 축적된다. 조율 없는 축적 — 이것이 이 이론의 가장 위험한 특성이다.
3. 실증적 관찰: 이 이론은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이 이론이 순수한 사고실험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사례들이 보여준다.
미국의 학교 총기난사. 콜럼바인(1999) 이후 미국의 학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이 되었다. 금속탐지기, 실탄훈련(active shooter drill), 방탄유리, 폐쇄형 건축 설계가 표준이 되었다. 공격자들 대부분은 서로 알지 못했고 조직적 연결도 없었지만, 이 연쇄가 미국 학교라는 시스템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다.
중국의 유치원 연쇄 흉기 습격(2010‒2011). 짧은 기간에 여러 도시에서 서로 무관한 개인들이 유치원을 흉기로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유치원의 보안 체계 전체가 재편되었고, 이 이슈는 정치적 민감성을 획득해 보도 통제 대상이 되었다.
유럽의 차량 돌진 공격. 니스, 베를린, 런던,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공격 이후 유럽 도시의 보행자 구역·크리스마스 마켓·주요 축제 공간의 물리적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볼라드 설치, 접근 통제, 감시 강화). 공격자 중 일부는 이념적 배경이 있었지만, 상당수는 사실상 무연관 개인이었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이 이론이 예측하는 "붕괴"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지속적 변형의 형태로 이미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7에서 논하겠지만, 이 변형이 무한할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4. 가속 요인: 실행 능력의 문턱은 이미 붕괴하고 있다
이 이론에 대한 고전적 반박 중 하나는 "실제 실행 능력의 기저율이 낮다"는 것이었다. 파괴적 의도는 흔하지만, 계획·수단·기회를 갖춘 개인은 드물다는 논리다. 이 반박은 20세기의 조건에서는 유효했다. 21세기에는 그렇지 않다.
정보 접근성의 혁명. 과거 무기 제조, 표적 정찰, 화학·생물학적 위해물질의 합성에 관한 정보는 국가 정보기관이나 특수 훈련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했다. 오늘날 이 정보들의 상당 부분은 오픈 인터넷과 다크웹에 산재해 있다. 개인은 국가 수준의 정찰 능력에 근접한 오픈소스 정보만으로 표적을 분석할 수 있다.
AI에 의한 인지적 문턱의 하락. 과거에는 계획 수립, 물류 조율, 기술적 문제 해결에 상당한 인지적 자원과 전문성이 필요했다. LLM 기반 도구는 이 문턱을 급격히 낮춘다. 특정 도메인 지식이 없어도 계획의 뼈대를 구성할 수 있고, 표적 시스템의 취약점 분석에서 인간 전문가에 준하는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이는 단일 개인의 유효 지능과 유효 전문성을 극적으로 확대한다. AI 안전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경고해온 "능력 확산(capability diffusion)"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수단의 민주화. 3D 프린팅 무기, 상업용 드론의 무기화, 합성생물학의 접근성 확대, 사이버 공격 도구의 상품화(ransomware-as-a-service 등) — 이 모든 것은 과거 국가·조직 수준의 자원이 필요했던 파괴 능력을 개인 수준으로 이양시키고 있다. 카이 파이필드(Kai Fyfe)와 여러 안보 연구자들이 지적한 "폭력의 개인화(individualization of violence)" 궤도이다.
표적 정보의 실시간성. 소셜미디어와 오픈소스 정보는 사실상 실시간의 표적 추적을 가능하게 한다. 정치인의 동선, 대중 집회의 정확한 시간·장소, 시스템의 병목 지점 — 모두 공개적으로 조회 가능하다.
이 네 가지 요인의 결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명의 무연관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파괴의 상한선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다. 20세기의 "미친 한 명"은 도구적으로 매우 제한되어 있었고, 그래서 실제 임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21세기의 "미친 한 명"은 20세기의 소규모 조직에 준하는 능력을 개인적으로 보유할 수 있다.
이론의 이 부분이 갖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기저율이 낮아서 10명이 없다"는 반박은 시효가 있다. 그리고 그 시효는 이미 만료되어가고 있다.
5. 순수한 무연관성: 왜 미디어 개입이 무력한가
이 이론에 대한 또 다른 고전적 반박은 "모방 확산(contagion)은 미디어 정책으로 통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자살 보도 가이드라인이 베르테르 효과를 실증적으로 감소시켰다는 근거가 이 반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 반박은 전제에서 틀렸다. 모방과 무연관 발생은 근본적으로 다른 현상이다.
모방은 A의 행동이 B의 행동을 촉발하는 인과적 연결을 필요로 한다. 미디어가 이 인과의 매개체이므로, 미디어 통제가 개입 지점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무연관 발생은 A의 존재를 B가 알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영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회 조건에서 독립적으로 산출된다.
이 구별의 함의는 결정적이다.
미디어 통제는 무연관 발생에 대해 무력하다. 자살 보도 가이드라인이 성공하는 것은 자살이 부분적으로 모방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유형의 극단적 행동이 개인의 심리적·사회적 조건의 독립적 산물이라면,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 발생률은 미디어 노출과 무관하게 유지된다. 우리는 하나를 막으려다 다른 것에 실패할 수 있다.
"공통 조건"의 문제로 이동한다. 무연관 발생을 낮추려면 개인들의 산출을 낳는 공통 조건 자체를 다루어야 한다: 사회적 원자화, 의미의 상실, 정신건강 인프라의 붕괴, 경제적 좌절, 급진적 이념의 배경 확산. 이는 미디어 정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개입이며, 대부분의 사회가 실질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개입 지점의 부재는 이 이론의 가장 어두운 특성이다. 조직 테러는 조직을 무너뜨리면 된다. 모방 테러는 미디어를 통제하면 된다. 무연관 테러는 무엇을 무너뜨리고 무엇을 통제해야 하는가? 개별 개인이 임계에 도달하기 전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탈하도록 만드는 것 — 이는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조건에 대한 개입이다.
여기서 이 이론은 훨씬 더 무거운 무게를 갖게 된다. 개입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 위협은 통상적 안보 담론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6. 누적 피로: 왜 변형은 무한할 수 없는가
이 이론에 대한 세 번째 고전적 반박은 "시스템은 붕괴하지 않고 변형된다"는 것이었다. 축구경기는 무관중으로, 정치는 원격으로, 학교는 요새로 형태를 바꿔 존속한다는 논리다. 이 반박은 부분적으로 옳지만 결정적 한계가 있다. 변형에는 비용이 있고, 비용은 누적된다.
각 변형은 무형 자산을 지불한다. 축구경기가 무관중이 되면 관중석 문화·집합적 흥분·지역 정체성의 결절점이라는 축구의 무형 가치가 소실된다. 학교가 요새가 되면 학생-교사 관계의 개방성·놀이의 자유·공동체 공간이라는 학교의 본질적 특성이 소실된다. 정치가 벙커 정치가 되면 정치인과 시민의 접촉·거리 정치·민주주의의 물리적 현존이라는 정치의 형태가 소실된다.
시스템의 정체성은 형식이 아니라 기능이다. "축구경기"라고 명명되는 이벤트가 여전히 개최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여전히 축구경기라는 뜻이 아니다. 관중이 없고, 지역 정체성이 없고, 집합적 감정이 없는 90분간의 스포츠 이벤트는 명목상의 축구경기이지 문화적·사회적 실체로서의 축구경기가 아니다. 학교가 감옥과 구별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은 이미 학교가 아니다. 형식의 존속은 실체의 붕괴를 가릴 뿐이다.
변형의 비용은 자기제한적이다. 각 변형은 다음 변형을 어렵게 만든다. 축구경기를 무관중으로 바꾼 시스템은 다음 공격 앞에서 무엇을 더 포기할 수 있는가? 학교를 요새로 만든 시스템은 다음 사건 앞에서 무엇을 더 강화할 수 있는가? 임계에 접근할수록 다음 변형은 시스템의 기능적 정체성을 더 크게 훼손한다. 이는 로널드 코스(Ronald Coase)의 거래비용 이론과 제도 부패 이론이 시사하는 방향이다: 방어 비용이 시스템의 원래 가치를 초과하면, 시스템은 실질적으로 붕괴한다.
피로의 궤도는 비선형적이다. 초기 공격들에 대해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저비용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임계 근처에서는 각 단위 공격에 대한 대응 비용이 급격히 상승한다. 즉, 10번째 공격은 첫 번째 공격보다 훨씬 큰 상대적 충격을 가한다. 이는 카타스트로피 이론에서 익숙한 패턴이며, "변형으로 지속된다"는 낙관적 반박이 놓친 지점이다.
진정한 붕괴는 명목적 존속과 실질적 상실이 함께 온다. 이것이 이 이론이 예측하는 최종 상태이다. 시스템은 이름을 유지하지만 내용은 사라진다. 우리는 "축구경기"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실체는 이미 우리가 알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붕괴이다. 소멸보다 어쩌면 더 무거운 형태의 붕괴 — 왜냐하면 사회는 그것이 붕괴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계속 살아가기 때문이다.
7. 왜 아직 80억 중 10명이 존재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고찰
이 지점에서 이론은 여전히 답해야 할 파생 질문을 낳는다. 세계 인구가 80억이고, §4가 지적하듯 실행 능력의 문턱은 낮아지고 있으며, §5가 지적하듯 개입은 근본적으로 어렵다면 — 왜 이 10명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는가? 이 부재(不在)는 이론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이론이 낳는 가장 중요한 실천적 질문이다.
가능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실행 궤도의 좁음. 파괴적 충동은 흔하다. 그러나 그것이 결단 → 계획 → 수단 확보 → 마지막 문턱 통과 → 실행이라는 전 경로를 완주하는 확률은 여전히 극단적으로 낮다. 심리학적으로 대부분의 극단적 충동은 자기 진폭 안에서 소진되거나, 자기 자신을 향한다(자살로의 방향 전환). 타자를 향한 무목적 대규모 파괴로 방향지어지는 것은 특정한 심리적·서사적 구조를 요구한다.
둘째, 사회적 개입의 조용한 작동. 뒤르켐이 지적했듯 완전한 사회적 고립은 그 자체가 드물다. 가족·의료·이웃·경찰·심지어 우연한 낯선 이의 개입까지 — 대부분의 위험 궤도는 그 여정의 중간 어딘가에서 멈춰 세워진다. 우리가 관찰하는 사례는 이 모든 필터를 통과한 극소수이며, 이는 사회가 매일 조용히 수행하는 방어의 규모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셋째, 진화적 사회성. 인간의 신경생리학은 타자와의 연결을 강력한 보상 체계로 부호화한다. 완전한 무연관·무목적 파괴 지향의 심리적 구성은 진화적으로 매우 이례적이다. "미친" 상태에서조차 대부분의 인간은 여전히 어떤 이야기, 어떤 관계, 어떤 의미의 틀 안에 있으려 한다. 순수한 무의미 지향은 심리적으로 유지하기가 극히 어렵다.
넷째, 체스터턴의 역설. G. K. 체스터턴의 오래된 관찰이 여기 적용된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사회 계약을 이따금 파괴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에 파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회 질서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매 순간 수십억 명의 침묵의 협력이 그것을 재생산하고 있다. 10명의 부재는 이 협력의 규모에 대한 증거이다.
다섯째, 생존자 편향의 가능성. 이 이론이 이미 완전히 실현된 시스템은 우리 시야에 남아 있지 않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임계를 아직 넘지 않은 시스템들뿐이다. 이는 통계적 관찰이라기보다 우리가 그 조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의 특성이다.
그러나 이 필터들은 모두 취약해지고 있다. 이것이 §4·§5·§6의 논의가 §7에 부과하는 무거운 함의이다. - 실행 궤도의 좁음은 AI와 인터넷에 의해 넓어지고 있다. - 사회적 개입은 원자화·정신건강 인프라 붕괴·공동체의 해체로 약화되고 있다. - 진화적 사회성은 지속적 온라인 매개·의미 상실·니힐리즘의 확산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 체스터턴적 협력은 정치적 극단화·제도 신뢰 붕괴 속에서 얇아지고 있다.
즉 10명의 부재는 강한 안정성의 증거가 아니라 점점 약해지는 균형의 증거이다. 인류 문명이 축구경기·의회·학교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80억 명에서 그 좁은 심리적 구성의 10명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만들어졌더라도 위의 필터들이 그들을 실행 지점에 이르지 못하게 붙잡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필터들은 모두 약화 궤도에 있다.
이 관점에서 10명의 부재는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매일 재생산되어야 하는 사회적 성취이며, 그 재생산의 조건들이 훼손되고 있다면 부재는 그 조건들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
8. 종합적 함의
세 개의 강화된 논거(§4·§5·§6)와 하나의 고찰(§7)을 종합하면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궤도에 놓인다.
첫째, 이 이론은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시효 임박한 사회적 궤도이다. 20세기의 조건에서는 이 이론이 예측하는 사태가 실현되기 어려웠다. 실행 능력이 낮았고, 사회적 필터가 강했으며, 시스템의 방어 여유가 컸다. 21세기, 특히 AI 확산 이후의 조건에서는 이 세 전제가 모두 약화되고 있다. 이론은 그 시효가 다가옴에 따라 예언의 성격을 획득한다.
둘째, 통상적 안보 담론이 대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조직 침투로 막을 수 없고, 미디어 통제로 억제할 수 없으며, 시스템 하드닝으로 무한히 견딜 수도 없다. 이 세 가지가 통상적 안보의 세 축이라면, 이 이론은 세 축 모두를 우회한다.
셋째, 방어의 진짜 대상은 물리적 시스템이 아니라 그것을 성립시키는 조건들이다. 축구경기의 진짜 방어 대상은 경기장의 물리적 보안이 아니라, 관중이 갖고 오는 심리적 안전감·사회적 신뢰·공동체적 참여의 조건들이다. 학교의 진짜 방어 대상은 방탄유리가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을 학교이게 하는 개방성·안전감·사회적 계약이다. 이 무형의 조건들이 훼손되면 시스템의 형식이 유지되어도 실체는 붕괴한다.
넷째, "필터의 유지"가 문명의 핵심 과제로 부상한다. §7에서 열거한 필터들 — 실행 궤도의 좁음, 사회적 개입, 진화적 사회성, 체스터턴적 협력 — 이것들이 문명의 진짜 인프라이다. 이 필터들의 약화는 각각 통상적 정책 담론에서는 별개 문제로 다뤄지지만 (정신건강, 공동체, 사회적 신뢰, 정치적 극단화), 이 이론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통합된 문제이다.
다섯째, 종(種) 수준에서 이 이론의 무게는 결정적이다. 축구경기와 달리 인류에게는 "재개" 옵션이 없다. §4에서 논한 실행 능력의 확산이 대량살상 능력(CBRN, 인공지능 오용, 합성생물학)에 이를 때, 무연관 소수에 의한 실존 위험(existential risk)의 가능성은 실증적 문제가 된다. 국가 수준의 회복력 논리 — "변형으로 살아남는다" — 는 종 수준에서 통하지 않는다. 한 번의 성공이 재개 불가능한 종결이 되는 조건에서, 이 이론은 진단이 아니라 예언이다.
9. 구조적 유비: 페르미 역설의 사회학 버전으로서의 10인의 법칙
이 이론이 갖는 논리적 형태를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그것이 우주론의 고전적 문제와 구조적으로 동형(同型)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페르미 역설(Fermi Paradox)의 뼈대는 다음과 같다.
(1) 거대한 표본 크기 — 관측 가능한 우주에는 수천억 개의 별과 수천억 개의 은하가 있다. (2) 단순한 메커니즘 — 생명이 발생하고, 지능으로 진화하며, 확산한다. (3) 예측된 결과 — 우주는 지적 문명의 흔적으로 가득해야 한다. (4) 관측된 실재 —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관측하지 못한다. "모두 어디에 있는가?" (Enrico Fermi) (5) 부재가 데이터가 된다 — 이 침묵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는 근본 사실이 된다.
10인의 법칙의 뼈대는 정확히 같은 구조를 갖는다.
(1) 거대한 표본 크기 — 세계 인구는 80억이다. (2) 단순한 메커니즘 — 10명, 조직 불필요, 이념 불필요, 상호 인지 불필요. (3) 예측된 결과 — 축구경기·정치·학교·항공 여행은 이미 우리가 아는 형태로 존속할 수 없어야 한다. (4) 관측된 실재 — 그러나 이 시스템들은 (변형된 채로도) 여전히 존재한다. (5) 부재가 데이터가 된다 — §7에서 논한 그 관찰: 왜 10명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가?
구조가 같으므로 답변의 논리도 같아진다.
페르미 역설의 표준적 답변 중 하나는 그레이트 필터(Great Filter) 개념이다: 생명이 지적 문명을 거쳐 우주적 확산에 이르기까지의 경로 어딘가에 통과하기 극히 어려운 필터가 존재하며, 대부분의 후보가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가설이다. §7에서 열거한 다섯 개의 필터 — 실행 궤도의 좁음, 사회적 개입, 진화적 사회성, 체스터턴적 협력, 생존자 편향 — 은 10인의 법칙에 대한 그레이트 필터의 사회적 버전이다.
특히 다섯 번째 필터인 생존자 편향은 페르미 역설의 인간중심 원리(anthropic reasoning)와 정확히 같은 논리 구조를 갖는다. 페르미 역설에서 우리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여야 한다"는 조건에 갇혀 있다. 이미 실현된 재앙적 시나리오에서는 관측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인의 법칙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관측하는 시스템들은 이 이론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시스템들이다. 실현된 시스템은 우리 시야에 남아 있지 않다. 이는 통계적 관찰이 아니라 관측자 조건의 특성이다.
여기서 페르미 역설이 낳는 가장 무거운 질문이 10인의 법칙에도 정확히 대응하며 등장한다: 그레이트 필터는 우리 앞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
페르미 역설에서 필터가 뒤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것을 통과했다는 뜻이며,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시나리오다. 필터가 앞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마주하지 않은 재앙을 향해 걷고 있다는 뜻이며,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시나리오다. 로빈 핸슨(Robin Hanson)의 유명한 정식화는 이렇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외계 문명의 흔적이 없기를 바라라. 그것은 필터가 우리 뒤에 있다는 뜻이다."
10인의 법칙의 대응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두 시나리오로 갈라진다.
필터가 뒤에 있다면: 인간의 진화적 사회성, 오래 축적된 사회 제도, 인간 심리의 근본적 구조가 10명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 경우 안정성은 자연적이며 상대적으로 지속적이다.
필터가 앞에 있다면: 우리가 10명을 아직 관측하지 못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 — 공동체, 의미의 구조, 정신건강 인프라, 사회적 신뢰, 실행 능력의 상대적 어려움 — 이 우연히 결합되어 만들어낸 취약한 임계 유예에 불과하다. 이 조건들이 훼손되면 필터는 무너진다.
§4·§5·§6의 논의 — 실행 능력의 상승, 무연관성으로 인한 개입의 무력화, 누적 피로의 축적 — 는 이 질문에 대해 필터가 앞에 있다는 방향을 강하게 시사한다. 우리가 지금 관측하는 상대적 안정은 이미 확립된 문명의 성숙한 결과가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않은 임계에 대한 일시적 유예이다.
이 대응이 갖는 함의는 페르미 역설의 비관적 시나리오와 정확히 대칭이다. 페르미 역설의 비관 시나리오에서 우주가 조용한 이유는 대부분의 문명이 자기파괴적 임계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인의 법칙의 비관 시나리오에서 사회 시스템이 아직 안정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안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임계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유비의 마지막 통찰은 다음이다. 페르미 역설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문명이 다음 세기·다음 천년을 통과할 확률에 대한 질문이다. 10인의 법칙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사회 시스템이 다음 세대의 조건을 유지할 확률에 대한 질문이다. 두 질문의 구조는 같고, 그 답변의 무게도 같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우리가 관측하는 침묵은 안심의 근거가 아니라 경고의 근거이다.
10. 결론
무연관 10인 이론은 조직 테러 실패 담론에 의해 반박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세 가지 강화 논거는 그 반박들을 순차적으로 무력화한다.
실행 능력의 상승은 "기저율이 낮다"는 반박을 시효 만료시킨다.
진정한 무연관성은 "미디어로 통제 가능하다"는 반박의 전제를 무너뜨린다.
누적 피로는 "변형으로 지속된다"는 반박의 낙관을 해체한다.
이 결과 남는 이론은 다음과 같다: 21세기의 조건에서, 10명이라는 수는 이미 이론적 임계가 아니라 접근 중인 실질적 임계이다. 그리고 이 임계는 특정한 정책적 개입으로 방어할 수 없으며, 오직 문명의 근본 조건들의 유지를 통해서만 지연될 수 있다.
이 이론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결국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시스템의 명목적 존속인가, 아니면 시스템의 실질적 정체성인가? 이 둘은 같지 않으며, 이 이론이 예측하는 붕괴는 후자에서 먼저 일어난다.
둘째, 무엇이 10명의 부재를 매일 재생산해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조건들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모른 채로 훼손하고 있다면, 이 이론이 시효를 다한 시점에 우리는 왜 그것이 실현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셋째, 회복력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 층위(즉 종 수준)에서 우리는 이 이론에 대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국가 시스템의 회복력이 종 수준의 회복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두 층위의 구분은 실존 위험 담론의 핵심이며, 10인의 법칙은 이 담론과 정확히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10인의 법칙은 이제 사고실험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궤도 위에 있는지에 대한 진단이며, 방어의 진짜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재정의이다. 이 이론이 예언으로 실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건은, 파괴의 통상적 방어가 아니라 사회의 조용한 인프라 — 의미, 관계, 공동체, 정신적 건강, 사회적 신뢰 — 의 재구축이다. 이는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문제이다.
이론이 정확할수록, 그것이 요구하는 대응은 무거워진다. 10인의 법칙은 정확한 이론이며, 따라서 그것이 요구하는 대응은 통상적 정치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 이상이다. 이것이 이 이론의 마지막이자 가장 어려운 함의이다.
어느 과로 가고 싶니?
어느 과로 가고싶니?
제가 의대생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거의 항상 따라오는 질문입니다. 보통은 '성적 따라서 갈 것 같다'라거나 '딱히 명확한 꿈이나 뜻이 있어서 의대를 온 게 아니라 아직은 잘 모르겠다'라고 답합니다. 너무 솔직한 것 아닌가 하지만 거짓말은 못하겠습니다. 제 성격이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어서 라기보다는 나중에 '너 그때 그렇게 한다고 말했잖아?'라고 누군가 따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로 상당히 피곤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같을 수는 없을지라도 너무 자주 변한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진심이 담기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명확한 뜻 없이 의대에 왔다는 말이 제가 누군가에 의해 의대에 진학하는 것을 강제 받았거나 의학에 진심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제 인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진리는 바로 '최고가 되고자 하는 향상심'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진심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최고라는 것은 상당히 애매한 단어입니다. 작은 무리 안에서 최고를 의미할 수도 있고, 학교에서의 최고를 의미할 수도, 보다 넓은 단위에서의 최고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최고를 원한다고 하지만 자신과의 타협을 반복하며 그 범위를 점점 좁힌 적도 많았습니다. 또한 최고는 제가 생각하기에 최선에서 한 단계 타협한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최선은 끝이 없습니다. 7시간을 공부했으면 8시간 공부하는 것이 더욱 최선일 수 있고, 8시간을 공부했으면 16시간을 공부하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더 할 걸', '오히려 그때 잠을 충분히 잤다면'. 어떻게 이런저런 일말의 후회도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최고는 다릅니다. 2등보다만 잘하면 된다는 선이 명확합니다.
결과적으로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이상, 이곳에서 다시 한번 제 인생의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저를 갈아 넣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미래입니다. 가끔 본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미래의 나에 대한 연민과 불안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미래의 저를 위해서 지금의 제가 해줄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게 되고, 그렇게 지금 군대에서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고민하고 있던 질문, '내가 최고를 지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얼추 윤곽선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아마 미래의 내가 고를 수 있는 인생의 선택지를 넓혀주기 위함이 아닌가 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저는 뭔가 하나를 정하는 것에 큰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하나를 선택했는데 다른 길이 더 옳은 길이였다면, 저는 더 잘 알아보지 못한 과거의 나를 강하게 질책하면서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정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면책권을 부여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노력이 부족하여 다른 길이 좋은 길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저는 더이상 저를 용서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향상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불가해한 존재를 보는 듯합니다. 제 이해를 벗어난, 그 행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외계 종족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공부를 하기 싫어 어떻게든 주제를 찾아 글이나 쓰고 있는 저 자신이 참 모순적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다채로운 삶을 그려나가는 것은 이런 모순적인 모습 또한 삶에서 중요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저의 눈에 불가해한 존재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어쩌면 저를 보고 불가해한 외계 종족으로 볼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삶을 살아내는 방식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끝끝내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최근 우연히 뜬 본과 시험 브이로그를 본 이후로 제 유튜브 알고리즘은 비슷한 영상들로 점령당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본과생들의 유튜브 브이로그들을 자주 챙겨보게 되었는데, 열심히 공부하고 당연한 결과로서 좋은 성적을 받고 기뻐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던 영상들은 제 생각과 많이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저러다 급사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체력과 시간을 갈아 넣고도, 좋은 성적도 아닌 겨우 시험 하나가 끝났다는 것에 잠깐 기뻐할 틈도 없이 다음 시험 준비가 시작됩니다. 영상을 보는 내내 숨이 막혀 왔습니다. 과연 저도 그렇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나이가 좀 있다는 게 마음 한 켠에 걸리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그들이 브이로그의 마무리로 빛나는 성적표가 아니라 단지 시험이 끝났다는 것 하나에 조용히 기뻐하는 모습에서, 그저 자신의 삶을 버텨내고 있고 버텨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대단하게 보입니다. 저 또한 버텨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미래의 나에게 버텨낼 힘과 지혜를 물려주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글 쓰는 것을 멈추고 운동을 다녀왔다가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스티븐 호킹의 하향식 우주론(top-down cosmology) 아주아주 대략 이해하기
[Veritasium-파인만 경로적분과 최소 작용의 원리에 관한 영상 /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박권 지음]
우리는, 이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최근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론 중 하나인 하향식 우주론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에 큰 흥미가 생겨 이해를 해보고자 하였지만 수박 겉핥기 식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래는 내가 며칠 동안 이해하려 발버둥 치면서 알게 된 내용들이다. 솔직히 내가 이해하고 서술한 내용들이 맞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미묘한 차이로 보였던 것들이 알고보면 완전히 다른 설명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
하향식 우주론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개념들이 있다.
[플랑크 상수]
플랑크 상수는 전구의 효율성을 테스트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산업적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조명이 더 효율적인지, 투입한 에너지 대비 가시광선을 얼마나 방출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독일 제국 물리기술연구소(PTR)에서 뜨거운 물체가 내는 복사(열복사)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연구자들은 문제를 이상화하기 위해 흑체(black body)를 정의했다. 흑체란 자기 자신에게 오는 모든 전자기파를 완전히 흡수하는 이상적인 물체로, 이 물체가 내놓는 복사는 재질과 무관하게 오직 온도로만 결정된다. 실험적으로 이론적 흑체에 가까운 물체를 만들기 위해 내부를 검게 칠한 공동에 작은 구멍을 뚫은 박스를 사용하였다. 구멍으로 들어간 빛은 내부에서 반사를 거듭하며 결국 다 흡수되므로, 구멍 자체가 거의 완벽한 흑체처럼 행동한다. (박스가 흑체가 아니라 구멍이 흑체인 것에 주의해야 한다. 구멍으로 들어간 빛은 안에서 거의 다 흡수되어 밖으로 나올 확률이 0에 수렴한다. 반대로 그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복사가 해당 온도의 흑체복사다. 박스는 구멍이 이상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어주는 장치일 뿐이다.)
흑체(구멍)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측정하여 스펙트럼을 도출하였는데, 이는 두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1) 온도가 오르면 방출되는 총 에너지는 급격하게 증가한다(그래프 아래 면적). 2) 스펙트럼의 봉우리(가장 강하게 방출되는 파장)는 온도가 오를수록 짧은 파장 쪽으로 이동한다(빈의 변위법칙). 쇠를 달구면 처음에는 붉게, 더 달구면 주황, 노랑을 거쳐 백색으로 빛나는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계속해서 달구다 보면 모든 가시광선 스펙트럼 영역에서 강하게 방출되는 때에 백색으로 보인다.)
문제는 당시의 고전물리학으로 이 스펙트럼 곡선을 유도하려 할 때 발생했다. 공동 내부의 전자기파는 기타 줄처럼 정상파 모드(정상파에서 발생하는 반파장 단위)들로 나눌 수 있고, 열평형 상태에서는 통계역학의 에너지 등분배 정리에 따라 각 모드가 평균적으로 kT만큼의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이때 파장이 짧아질수록 공동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정상파 모드의 개수는 한없이 많아지고, 이 모든 모드가 똑같이 kT씩 받는다면 짧은 파장 영역에서 방출 에너지가 점점 무한대로 발산해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다. 실험적(실제) 스펙트럼은 짧은 파장에서 오히려 0으로 떨어지므로, 당시의 고전물리학에는 오류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등분배 정리란, 온도 T의 열평형계에서는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자유도 하나하나가 평균 (1/2)kT씩을 가진다(k는 볼츠만 상수)는 이론이다. 공동 속 전자기파의 각 정상파 모드도 하나의 진동 자유도이므로 평균 kT(전기장 자유도 + 자기장 자유도)씩 받아야 한다. 한편 단위 부피당 모드 수는 파장의 네제곱에 반비례해 증가하므로(상자 안에 들어가는 파동의 전체 개수 N을 구한다. N∝λ^(-3)
파장이 아주 조금 변할 때(d\λ), 파동의 개수가 얼마나 추가되는지(dN) 그 변화량을 구한다. dN∝λ^(-4)), 모드당 기여는 일정한데 모드의 수가 발산하는 구조가 자외선 파탄의 본질이다.)
플랑크는 공동의 벽(박스 내부 벽)을 이루는 수많은 미시적인 진동자들이 전자기파와 에너지를 주고받는 상황을 모형화했다. 여기서 그는 볼츠만의 통계 기법(에너지를 유한한 크기의 조각으로 잘라 배분하는 경우의 수를 세는 방법)을 차용했다. 원래 그는 이 기법의 계산 마지막에 조각의 크기를 0으로 보내는 극한을 취해 연속적인 에너지의 형태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외선 파탄이 재현되었고, 조각의 크기를 진동수에 비례하는 유한한 값 E=hf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이것 또한 고전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선 아이디어인데, 고전물리학에서 파동의 에너지는 오직 진폭에 의해서만 에너지가 변동된다고 생각했다. 진동수는 에너지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해당 수식을 실제 스펙트럼 그래프와 맞아떨어지게 하는 상수 h값이 바로 플랑크 상수(6.626×10^{-34}J•s)다. 에너지의 양자화가 파탄을 막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진동수가 높은 모드일수록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최소 단위 E=hf가 커지는데, 온도 T의 열적 환경이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 규모는 kT 수준이다. hf가 kT보다 훨씬 큰 고주파 모드는 첫 에너지조차 받지 못해 자유도의 동결(Freeze-out)이 발생하고, 그 결과 스펙트럼이 짧은 파장 쪽에서 0으로 떨어진다. 무한히 많은 고주파 모드가 있어도, 그 대부분이 에너지를 아예 받지 못하므로 총합은 유한하게 된다.
여기서 개념의 구분이 하나 필요하다. 플랑크가 양자화한 것은 벽의 진동자가 에너지를 주고받는 방식이지, 빛 또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다. 플랑크 본인은 양자화에 대해 수학적 편법으로 여겼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빛의 입자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얽힘(Entanglement)]
두 입자가 얽혀 있다는 것은 두 입자의 상태가 하나의 파동함수로 묶여 있어 한쪽을 측정하면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른 쪽의 상태가 즉시 결정된다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이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라 부르며 불편해했던 현상이다. 하지만 얽힘을 이용해도 빛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쪽의 측정 결과는 무작위이기 때문에(관찰자가 결과를 조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과값이 나오기 전까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동전 던지기와 같다) 상대방과 결과를 비교하려면 고전적 통신이 필요하다(정보를 전송하려면 의도가 들어가야 한다. 모스 부호처럼 의도적으로 결과값을 배열해야 정보를 가진 메시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측정 결과를 통제할 수 없으니 애초에 의도적으로 결과값 배열 자체가 불가능하고 정보를 담을 수 없다. 따라서 얽혀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한쪽의 데이터를 다른 쪽으로 고전적 방식으로 전송하여 서로 정확히 반대로 짝이 맞춰져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양자 결어긋남(decoherence)]
간섭은 진폭이 상쇄·보강되는 현상이다. 양자역학에서 어떤 결과가 일어날 확률은 진폭이라는 값에서 나온다. 진폭은 확률이 아니라, 확률의 전 단계에 있는 값이다. 진폭에서 실제 확률을 얻으려면 그 크기를 제곱해야 한다. 이 제곱 단계가 둘을 구분 짓는 핵심으로, 진폭은 부호(위상)를 가질 수 있는 반면(+0.5일 수도 0.5일 수도 있다) 제곱하는 순간 그 부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0.5)²와 (−0.5)²는 똑같이 0.25다). 간섭이란 바로 이 부호가 살아있는 진폭들이 제곱되기 전에 서로 만나 더해지는 현상이다. 두 진폭이 같은 부호면 커지고(밝은 무늬) 반대 부호면 상쇄된다(어두운 무늬). 부호가 죽기 전에 만나야만 상쇄가 가능하다.
이때, 아무 진폭이나 더해지는 게 아니다. 두 경로의 최종 상태가 같으면 진폭을 먼저 더하고, 그 합을 제곱한다. 부호가 살아있는 채로 만나므로 상쇄·보강이 일어난다(간섭이 있다). 두 경로의 최종 상태가 다르면 각 진폭을 먼저 제곱해 확률로 만들고, 그 확률들을 더한다. 제곱하면서 부호가 죽으므로 상쇄가 불가능하다(간섭이 없다).
확률이란 결국 그 결과가 실현될 확률이다. 서로 다른 최종 결과는 애초에 배타적인 별개의 사건이라 확률이 그냥 더해질 뿐 겹칠 수 없다. 반면 하나의 동일한 결과에 여러 방법으로 도달할 때만 그 방법들이 하나의 결과에 대한 여러 기여이므로 진폭 수준에서 합쳐진다. 숫자로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두 경로의 진폭이 +0.5와 −0.5일 때 최종 상태가 같으면 먼저 더해서 0이 되고 제곱해도 확률은 0이다. 최종 상태가 다르면 각각 제곱해 (0.25 + 0.25 = 0.5) 상쇄가 사라진다. 같은 진폭인데도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결어긋남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양자계는 완벽히 고립될 수 없어 주변의 공기 분자, 광자, 열복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이 상호작용에서 벌어지는 일은 환경의 상태가 계의 경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전자가 이중슬릿을 지나 스크린의 한 점 P에 도달하는 경우를 보자.
환경이 개입하지 않았을 때
왼쪽 슬릿을 지난 경우의 최종 상태 = 전자가 P에 있음
오른쪽 슬릿을 지난 경우의 최종 상태 = 전자가 P에 있음
이 둘은 동일한 최종 상태다. 그래서 진폭이 더해지고 간섭무늬가 생긴다.
이제 전자가 왼쪽을 지날 때 근처 공기 분자가 A방향으로 튕기고, 오른쪽을 지날 때 B방향으로 튕긴다고 할 때
왼쪽을 지난 경우 =전자가 P에 있음 + 분자가 A방향
오른쪽을 지난 경우 = 전자가 P에 있음 + 분자가 B방향
전자의 위치는 P로 같지만, 우주 전체의 상태는 분자 부분에서 갈라져 서로 다른 최종 상태가 된다. 규칙에 따라 진폭이 아니라 확률이 더해지고, 간섭무늬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결어긋남이다.
결국 누군가 그 공기 분자를 실제로 관찰해 A인지 B인지 알아낼 필요가 전혀 없다. 분자의 상태가 경로에 따라 달라졌다는 사실, 즉 원리적으로 구별 가능한 차이가 어딘가에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최종 상태는 이미 갈라졌고 간섭은 불가능해진다.
이를 보여주는 실제 실험이 있다. 큰 분자(플러렌 같은 것)로 이중슬릿 간섭을 시킬 때, 분자의 온도를 높이면 간섭무늬가 점점 흐려진다. 뜨거운 분자는 열복사 광자를 방출하는데, 그 광자의 파장이 두 슬릿 간격보다 짧아지면 광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에 대한 구별 가능한 정보를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광자를 일부러 관측하지 않아도 방출되었다는 것만으로 무늬가 사라지고, 반대로 분자를 차갑게 유지하면 간섭이 돌아온다.
거시 물체에서는 이 과정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물체가 클수록 부딪히는 공기 분자와 광자가 많고, 그 각각이 물체의 위치 정보를 실어 날라 최종 상태를 갈라놓는다. 먼지 한 톨 크기 물체의 위치 중첩조차 대략 10⁻³¹초 수준에서 결어긋남이 발생한다. 그래서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고양이 같은 거시적 중첩을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환경이 즉각 최종 상태를 갈라놓아 간섭 가능성을 없애기 때문이다.
결어긋남은 왜 간섭이 사라지고 왜 세계가 고전적으로 보이는지는 정확히 설명한다. 하지만 여러 갈라진 가능성 중 왜 단 하나의 결과만 실제로 실현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결어긋남이 말해주는 것은 왼쪽 결과와 오른쪽 결과가 더 이상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고, 그중 오른쪽이 실제로 일어남 은 어떻게 정해지는가는 다세계 해석, 코펜하겐 해석 등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어 미해결 지점으로 남는다.
[확률진폭(complex amplitude)과 이중슬릿 실험]
양자역학에서 진폭은 확률진폭(complex amplitude)을 말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역사(가능성) 하나하나에 존재하는 복소수(진폭)을 전부 더한다. 진폭들은 복소수라 위상이 있어서 더할 때 서로 보강되거나 상쇄된다. 위상이라 함은 복소수 좌표계에서 한 화살표(양자시계(Quantum watch)라고도 한다)의 길이(원점에서의 거리)와 방향(각도) 중 방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3+2i는 길이가 약 3.6이고 방향이 약 35도쯤 되는 화살표가 있다면 위상은 35도이다. 두 화살표를 더할 때, 화살표가 비슷한 방향으로 뻗어있으면 최종 화살표가 길어진다(발생 확률이 커진다). 따라서 역사가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역사라는 것이 파동처럼 출렁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각 역사(가능성)마다 복소진폭이 붙고, 그것들이 간섭한다는 뜻이다.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것도 물질 자체가 파동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자가 위치할 확률들의 결과를 보니 파동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뜻이다.
우주의 모든 입자가 확률적인 파동이라는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으로부터 나온다.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로 인해 파동인 줄 알았던 빛이 입자성까지 동시에 가진다는 사실이 널리 퍼지자, 학자들은 역으로 입자인 줄 알았던 것들도 파동의 성질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루이 드브로이는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로, 운동량 p로 움직이는 모든 물질은 파장 λ=h/p의 (확률)파동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드브로이의 가설은 현실의 실험적 결과를 증명하는데 위력적이었다. 닐스 보어의 원자모형에서는 수소 원자에서 전자가 특정 궤도들만 돌 수 있다고 가정해 수소 스펙트럼을 설명했지만, 이러한 가정은 관측 결과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었다(고전 전자기학에 따르면 궤도를 도는 전자는 에너지를 복사하며 핵으로 나선 추락해야 했지만(라모어 공식에 따르면 전하를 띠는 입자가 가속운동(원운동 또한 가속운동의 일종이다)하면 전자기파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된다. 라디오 등 안테나의 원리이기도 하다) 원자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수소 스펙트럼 또한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한 선(Rydberg 공식)으로 나온다). 하지만 드브로이의 가설에 따라 전자 또한 파동으로 본다면, 궤도 둘레를 따라 파장이 정수 개로 딱 맞아떨어져 제 꼬리를 제가 무는 정상파를 형성하는 궤도만이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둘레 = n\λ 조건은 보어의 각운동량 양자화 조건(mvr=nℏ)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후 데이비슨-거머 실험 등에서 전자가 결정 격자에 의해 회절하는 현상이 실제로 관측되며 물질 또한 파동(물질파)이라는 것은 실험적 사실이 되었다.
또한 물질의 파동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중슬릿 실험이다. 파동을 두 개의 슬릿에 통과시키면 두 슬릿에서 퍼져 나온 파동이 겹치며 보강 또는 상쇄 간섭이 일어나 스크린에 밝고 어두운 줄무늬(간섭무늬)가 생긴다. 빛으로 해도 똑같이 간섭무늬가 나타나 빛의 파동성을 보여준다(영의 실험).
이번엔 전자를 이중슬릿에 쏘아 보자. 전자를 한 번에 하나씩, 서로 영향을 줄 수 없게 시간 간격을 두고 쏘아도 스크린에는 전자 점들의 분포가 정확히 간섭무늬를 이룬다. 전자 한 개가 마치 두 슬릿을 동시에 지나가면서 자기 자신과 간섭을 일으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각 전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 측정 장치로 확인하면 간섭무늬는 사라지고 직관적 예상에 따르는 두 줄 분포만 남는다. 즉, 관측(측정)을 하는 순간 두 파동이 더는 간섭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하인츠-디터 제, 보이치에흐 주렉, 에리히 주스 등이 발전시킨 양자 결어긋남(decoherence) 이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바로 위에서 설명한 개념).
[최소작용 원리와 파인만의 경로 적분]
파인만은 대학에서 이중슬릿 관련 강의를 듣던 중 중첩된 파동의 세기는 각 파동의 진폭을 먼저 더한 후 제곱한 값이 최종 파동의 세기가 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슬릿의 개수를 무한히 늘렸을 때도 똑같이 진폭을 다 더한 것의 제곱을 하면 된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는 양자역학적 확률 밀도에도 적용되는데, 슬릿이 무한하다는 뜻은 슬릿 왼쪽 지점인 A에서 슬릿 오른쪽 너머 지점인 B로 가는 가능한 모든 경로의 진폭을 다 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입자가 발견될 확률은 가능한 모든 경로(태양을 찍고 돌아오는 경로, 은하 중심을 다녀오는 경로 등)의 확률 진폭을 모두 합한 뒤 제곱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해당 입자가 그 모든 경로를 탐색하고 온다는 뜻이 아니다. 그 가능한 모든 경로들 중 가장 있을법한 경로가 우리 눈에 보인 것이다. 모든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 눈에 그 결과가 보이게 되면 해당 역사가 선별되는 사후 선별과 의미를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사후 선별은 바로 다음 개념 설명에서 다루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경로의 확률 진폭을 합하는 것을 파인만의 경로 적분이라 한다. 경로 적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물리와 대비해보아야 한다. 야구공을 던지면 정확히 하나의 포물선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방법이 원리적으로는 무한히 많은데(직선, 지그재그, 달 찍고 오기 등) 실제로는 딱 하나의 궤적만 선택되어 관측된다. 고전물리는 이를 최소작용의 원리(principle of least action)라고 한다. 각 가능한 경로마다 작용(action)이라는 숫자를 하나 부여할 수 있는데, 자연이 선택하는 경로는 이 작용의 값을 최소로 만드는 경로이다. (대략적으로 덧붙이자면 작용이란 그 경로를 따라가는 동안 쌓이는 운동에너지-위치에너지의 시간 합이다. S = integral(t1-t2)(T-V) dt) 파인만은 여기에 질문을 던졌다. 만약 자연이 하나만 고르는 게 아니라면, 만약 광자가 A에서 B로 갈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다 지나가는 거라면? 이 모든 경로를 동시에 지나가면서 각 경로가 도착 지점에 기여하는 걸 합산한 결과로 최종 확률이 정해지는 것 아닐까?
각 경로 하나하나에 화살표를 부여한다. 이 화살표의 방향(위상)은 그 경로의 작용에 의해 정해진다. 작용이 크면 화살표가 많이 돌아가고 작으면 덜 돌아간다. (위상 화살표를 돌리는 기준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입자가 궤적을 따라 이동하며 겪은 에너지와 시간의 총합) 그리고 A에서 B에 도착할 확률진폭은 모든 경로의 화살표를 다 더한 결과다. 최종 화살표 길이를 제곱하면 실제로 A에서 B로 갈 확률이 나온다. 수많은 경로의 화살표를 다 더하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경로는 서로 상쇄된다. 위상은 경로의 작용 S를 ℏ로 나눈 값이다. 직관적으로는, 각 경로마다 작은 시계 바늘이 하나씩 있어 경로를 따라가는 동안 S/ℏ에 비례해 회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최소작용 경로 근처에서는 경로가 조금 바뀌어도 작용이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이웃 경로들의 화살표가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고 서로 보강해서 최종 화살표를 만든다(이때 근방의 경로 다발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완전한 단일 경로가 아니라는 뜻으로, 실제로 이것에 의해 양자 요동, 양자 터널링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최소작용 경로에서 먼 경로(이상한 경로들)는 그것과 조금만 다른 경로라 하더라도 작용이 매우 크게 달라져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렇게 인접한 경로들끼리 화살표 방향은 가히 랜덤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빠르게 회전하여 다 더하면 거의 대부분 상쇄되어 버린다. 공은 크고 무거워서 작용의 크기가 매우 크다. 조금만 최소작용 경로를 벗어나도 위상이 마구 돌아버리고, 최소작용 근처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전자 수준에서는 작용 S의 값이 ℏ수준으로 작다. 따라서 상쇄가 불완전하고 넓은 범위의 경로가 살아남아 이중슬릿 간섭이 그대로 나타난다. 빛의 직진, 반사, 페르마의 최소 시간 원리(어떻게 빛이나 공이 출발하기도 전에 어떻게 모든 경로를 비교해서 최적 경로를 아는 건지는 수백 년간 논쟁거리였다.)도 모두 같은 논리다.
지금까지의 얘기만 들어보면 빛 등이 모든 경로를 지나간다고 가정한 후 논리를 진행한 것 같다. 그러나 입자(알갱이)는 안 갔을지 몰라도, 그 입자가 존재할 확률 파동은 분명히 거울의 가장자리까지 실제로 퍼져나가 훑고 지나갔다. 이것을 증명하는 실험이 실제로 있다. 레이저를 거울에 비스듬히 쏘면, 입사각과 반사각이 같아지는 정반사 지점을 경유한 빛만 눈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반사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거울 가장자리 부분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레이저 빛은 보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는 그 부분으로 빛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로적분의 해석은 다르다. 거울 가장자리를 경유해 눈으로 오는 경로들도 전부 진폭을 기여하고 있다. 다만 그 영역에서는 인접한 경로들끼리 위상이 빠르게 달라져 위상이 전 방향을 고르게 가리키며 짝지어 상쇄될 뿐이다. 즉, 빛이 안 가는 것이 아니라 경로들이 서로를 지우는 것이다. 결국 상쇄가 일어나는 이유가 반대 위상의 경로 짝이라면, 그 짝 중 절반을 물리적으로 제거했을 때 상쇄가 풀리고 빛이 나타나야 한다. 실제로 정반사 지점에서 벗어난 거울 영역에 위상이 반대가 되는 경로들이 경유하는 거울 상의 위치만 골라 가리도록 간격을 계산한 회절격자(검은 줄무늬)를 덮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던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선명한 반사광이 보인다. 이는 해당 경로들도 무언가가 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물리학이 실제로 보증하는 것은 모든 경로에 대해 합산하는 계산이 관측 결과를 정확히 따른다는 것이지, 그 너머의 무언가를 확언하지는 않는다.
[지연 선택(delayed choice)실험과 사후 선별(post-selection), 관계론적 양자역학]
존 아치볼드 휠러는 이중슬릿 실험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질문을 한다. 광자가 슬릿을 이미 통과한 후에, 경로를 측정할지 말지를 결정하면 어떻게 될까? 광자는 슬릿을 지나는 시점에 파동으로 통과할지 입자로 통과할지 미리 정해야 할 텐데, 우리가 측정 여부를 나중에 바꾸면 광자는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선택을 수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지연선택 사고실험은 1999년 김윤호 연구팀의 지연선택 양자 지우개 실험으로 정교하게 구현되었다.(역사(가능성)은 원래 중첩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준 실험)
실험의 구성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아르곤 이온 레이저 빔이 이중 슬릿을 통과한 직후, BBO라는 특수한 비선형 광학 결정에 부딪힌다(비선형 광학 결정이란 단순히 빛이 통과, 굴절, 반사하는 것을 넘어 빛 자체가 쪼개지거나 다른 파장으로 변환되는 특수한 결정을 말한다. 이 실험에서는 BBO의 비선형성 덕분에 광자 1개가 결정 내부에서 더 낮은 에너지(긴 파장)을 가진 얽힌 광자 2개로 쪼개진다). 이 결정은 자발적 매개 하향 변환(SPDC)이라는 과정을 통해 광자 하나를 서로 얽힌 광자 한 쌍으로 쪼갠다. 쌍둥이 중 하나인 signal 광자는 곧장 검출기 D0로 날아가 위치가 기록되고, 다른 하나인 idler 광자는 반투과 거울(빛을 절반 확률로 반사하거나 통과시키는 거울)들이 복잡하게 배치된 미로 같은 경로를 지나 네 개의 검출기 D1~D4 중 하나에 도달한다. 미로의 설계가 절묘한데, 아이들러 광자가 D3나 D4에 도달하면 원래 광자가 어느 슬릿에서 왔는지를 알 수 있고(경로 정보 획득, 예를 들어 D3는 왼쪽 슬릿, D4는 오른쪽 슬릿), D1이나 D2에 도달하면 두 슬릿의 경로가 거울에서 뒤섞여(마지막 beam splitter(BS, 절반 확률로 반투과하는 거울)에서 절반은 투과되고 절반은 반사된다. 따라서 어떤 광자가 검출되었을 때 그 광자는 위 입구로 들어와 투과된 것인지 아니면 아래 입구로 들어와 반사된 것인지를 알 수 없고, 위 입구로 들어와 반사된 것인지 아래 입구로 들어와 투과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슬릿에서 왔는지를 알 수 없어진다(경로 정보 지움).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들러 광자의 경로는 신호 광자의 경로보다 약 2.5미터 더 길다. 즉, 신호 광자는 자신의 쌍둥이가 어떤 검출기로 갈지(경로 정보 획득인지, 경로 정보 지움인지) 결정되기 약 8나노초 전에 이미 스크린에 도달하여 위치를 기록해 버린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아이들러 광자가 경로 정보를 지운 검출기(D1, D2)에 도달한 사건들만 골라서, 그 얽힌 신호 광자들이 D0에 남긴 위치를 모아 보면 선명한 간섭 무늬가 나타난다. 반대로 경로 정보가 확정된 검출기(D3, D4)와 얽힌 신호 광자들만 모으면 간섭 무늬가 없는 입자성을 가진 분포가 나온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나중에 일어난 아이들러 광자의 측정이 이미 스크린에 도달해버린 신호 광자의 과거 행동(파동이었는지 입자였는지)를 결정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역인과율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답은 D0에 기록된 전체 데이터에 있다. 아이들러 쪽 결과와 짝을 짓지 않고 D0에 쌓인 신호 광자들의 전체적인 위치 분포를 보면 간섭 무늬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무늬 없는 입자성을 가진 패턴만 보인다. 수학적으로 보자면 얽힌 쌍의 한쪽만 따로 떼어 본 신호 광자의 상태(축소 밀도 행렬)는 최대로 뒤섞인 혼합 상태여서 어떤 간섭도 보여줄 수 없다...라는데 잘 모르겠고, 이미 signal 광자와 idler 광자는 얽혀 있어 idler라는 관측자에 의해 signal은 이미 관측당한 상태, 즉 결어긋남(decoherence)이 발생한 상태다. 즉 과거에 스크린에 새겨진 물리적 기록 자체는 미래의 어떤 선택에 의해서도 단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간섭 무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연구자들이 아이들러 광자의 측정 결과라는 별도의 정보(앞서 말했던 고전적 통신으로 얻은 데이터)를 이용해 D0의 전체 데이터에서 특정 부분집합만 골라냈을 때 비로소 간섭 무늬가 드러난다.(기존 이중슬릿 실험에서 간섭무늬가 바로 보이던 것과의 차이: 단일 광자는 매번 일정한 초기 위상을 가지므로 스크린의 동일한 위치에 간섭 무늬가 누적된다. 반면 얽힘 상태로 쪼개진 광자 쌍은 전체 위상의 합만 보존될 뿐 개별 광자의 위상은 매번 무작위로 결정되므로, 위치가 어긋난 간섭 무늬들이 누적되면서 전체적으로 간섭 효과가 상쇄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후 선별(post-selection)이라고 부른다. 비유하자면, 무작위로 찍힌 점들의 거대한 그림에서 빨간 점들만 뽑아봤더니 숨어 있던 그림이 나타난 것과 같다. 그림 전체는 처음부터 그대로였고, 우리가 나중에 어떤 기준으로 점들을 분류했느냐가 달라졌을 뿐이다(그림자 아트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예시로 들기에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D1과 짝지은 무늬와 D2와 짝지은 무늬는 정확히 반대 위상으로 어긋나 있어서(1. 반투과 거울에서 반사는 위상을 pi만큼 뒤집고 투과는 위상을 그대로 유지한다. 2. 모든 signal 광자의 idler는 결국 D1~4중 하나로 반드시 간다. 이때 D3와 D4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 슬릿 하나만 열어놓은 것과 같은 단일 덩어리다. 따라서 이 둘을 합치면 이미 D0와 같은 두 뭉텅이 형태의 간섭 없는 분포가 나온다. 그렇다면 남은 D1과 D2부분이 합쳐졌을 때도 두 뭉텅이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데 D1은 간섭무늬를 띠어 밝은 줄과 어두운 줄이 번갈아 있다. 이걸 D2와 합쳐서 간섭이 없는 결과가 되려면 D2의 밝은 줄이 정확히 D1의 어두운 줄 위치에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둘은 pi만큼 어긋난 반대 위상이다.), 둘을 합치면 무늬가 상쇄되어 사라진다. 전체 데이터에 무늬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이 실험은 과거를 바꾸는 실험이 아니다. 파동이나 입자냐 하는 성질은 광자 하나가 단독으로 지니는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얽힌 시스템 전체에서 어떤 정보를 추출하기로 했느냐에 따라 정의되는 관계적(relational) 속성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의 실재는 입자 하나하나의 성질이 아니라 정보와 상관관계의 그물망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론적 양자역학의 대표자로 카를로 로벨리가 있다. 그는 절대적인 물리적 상태는 없고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작용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해석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사고실험이 바로 위그너의 친구(Wigner's friend)다. 관찰자 A는 실험실 안에 있는 위그너의 친구다. A가 닫힌 방 안에서 동전을 던져 결과를 확인했을 때 앞면이 나왔다. A에게 동전의 양자 중첩은 깨졌고, 동전은 앞면이라는 확정된 실재를 가진다. 관찰자 B는 실험실 밖의 위그너다. B는 아직 실험실에 들어가지 않았고 A에게 결과를 듣지도 못했다. B의 입장에서 실험실 안의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 겹쳐있는 중첩된 상태다. 기존 양자역학에서는 누구의 상태가 물리적 진실인가를 두고 큰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로벨리의 관계론적 양자역학에서는 둘 다 맞다는 결론이 난다. 즉, 절대적인 시점은 존재하지 않고 실재는 오직 관찰자를 기준으로만 상태가 정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찰자가 꼭 의식을 가진 인간이나 측정 장비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전자 두 개가 서로 부딪히는 순간, 두 전자는 서로에게 관찰자가 된다. 상호작용하는 그 찰나에 두 전자는 서로에 대한 위치와 운동 정보를 주고받고,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일시적으로 확정된 실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스티븐 호킹의 하향식 우주론에 대해 아주아주 대략적으로 알아보자.
하향식 우주론이란, 우주가 하나의 확정된 역사(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가능한 역사들의 중첩으로 존재한다면, 기준은 명확한 모습을 가진 현재(현재 관측되는 우주의 모습)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를 기준으로, 현재의 조건들을 성립하는 데 부합하는 과거의 역사를 하향식으로 경로적분으로 역산해나가자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상향식 접근은 씨앗을 심고 어떤 나무가 자랄지 예측하는 것이고, 하향식 접근은 눈앞의 나무에서 시작해서 이 나무로 자라날 수 있었던 모든 과거 상태들의 확률을 통해 과거를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즉, 우리 우주는 3차원 공간을 가지고 관측자가 존재할 수 있는 물리 상수를 가진다 = 현재의 모습이 확률의 필터와 같이 작용하여 이 필터를 통과할 수 있는 역사들(현재의 조건과 양립하는 역사들)만이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관측이 과거를 물리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역인과율이 아니라는 뜻), 확정되지 않은 과거들의 중첩 상태에서 현재와 정합되는 부분집합(역사)이 선별되는 사후 선별이다.
파인만의 경로 적분을 우주 전체로 확장해 보자. 광자가 A에서 B로 갈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궤적을 거치듯, 우주 역시 초기 상태(빅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상 가능한 모든 시공간의 형태와 팽창 역사를 확률진폭으로서 거쳐왔다. 고전적 우주론(상향식 우주론)은 우주가 단 하나의 결정론적 궤적을 따라 진화했다고 믿었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여러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듯 우주 또한 무수히 많은 가능한 역사를 겪은 상태로 중첩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기존의 상향식(bottom-up) 우주론이 마주했던 심각한 딜레마, 미세조정 문제(fine-tuning problem)가 해결된다. 중력의 세기, 전자의 질량, 우주 팽창 속도 등 물리 상수들이 지금보다 아주 조금만 달랐어도 별이 형성되지 않거나 원자가 붕괴하여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상향식 우주론에서는 빅뱅 순간의 초기 조건이 로또를 연속으로 맞추는 수준의 기적적인 확률로 정밀하게 세팅되어 지금의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향식 우주론에서는 초기 조건이 특별할 필요가 없다. 빅뱅 직후에는 생명체가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물리 법칙을 가진 수많은 우주의 역사들도 파인만의 이상한 경로들처럼 진폭의 형태로 중첩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관측자(우리)가 우주를 관측하고 있다는 현재의 확정된 사실이 사후 선별의 기준점이 된다. 거울의 엉뚱한 위치를 거치는 빛의 경로들이 반대 위상과 만나 상쇄되듯, 현재의 우주적 조건과 양립할 수 없는 궤적(역사)들은 소거된다. 오직 지금의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조건의 역사들만이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아 서로 보강 간섭을 일으키고, 지금 우리가 보는 최종 화살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지연 선택 양자 지우개 실험을 우주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출기에서 얻어낸 아이들러 광자의 경로 정보 유무(현재의 조건)를 기준으로 D0의 밋밋한 전체 데이터 속에서 숨어있던 간섭 무늬(특정 역사)를 사후 선별해 낸 것과 완전히 동일한 논리다. 138억 년 전 우주가 어떤 경로로 진화할지 그 당시부터 미리 단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138억 년이 지난 지금 생명체라는 관찰자가 우주와 상호작용하는 그 순간의 조건들이 수많은 과거의 중첩 중 특정한 부분집합을 뽑아내어 지금의 우주를 구성한다. 우리가 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행위 자체가 중첩되어 있던 수많은 가능성의 과거 중 하나를 현재와 얽히게 만들어 확정된 실재로 끌어내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관계론적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주라는 거대한 시스템 역시 절대적이고 독립된 역사적 궤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호작용하는 두 전자가 서로에게 관찰자가 되어 실재를 확정 짓듯, 거시적 관찰자인 우리와 우주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찰나에 그물망 같은 관계 안에서 상대적인 실재를 이룬다. 양자 결어긋남을 통해 끊임없이 우주의 상태가 갈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명확한 최종 상태(결과)가 주어졌기에 그 수많은 갈래의 가능성들은 우리가 속한 단 하나의 물리적 역사로 정렬될 수 있다. 스티븐 호킹의 하향식 우주론은 우리가 거대한 우주에 던져진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양자역학적인 사후 선별을 통해 138억 년 전 빅뱅부터 시작된 가능성들의 중첩 속에서 지금의 우주 역사를 결정지은 가장 결정적인 '참여자'임을 시사한다(참여론적 우주론(Participatory Anthropic Principle)-존 아치볼드 휠러가 제안한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