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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4 – Ongoing·76 days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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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7

호흡의 기술 - 제임스 네스터

어젯 밤, 자대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을 위해 일찍 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코가 막히면서 코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입으로 호흡하면서 잘 수밖에 없었는데, 목이 건조해지고 입이 바싹 마르면서 얼마나 잠에 들기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대대에 출근했고, 시간이 남아 책장을 봤는데 한 눈에 들어온 시원한 파란색의 책이 있었다. 그 주제도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호흡"과 관련된 책이었다.

우리는 일생동안 수억~수십억 번 호흡을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항상 하는 것이 호흡이고 생명유지에 가장 원초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만큼 그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호흡의 방식"이 우리 몸의 모든 곳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하면 믿을 수 있는가? 호흡을 천천히 하든 빠르게 하든, 깊게 하든 얕게 하든, 입으로 숨을 쉬든 코로 쉬든 다 똑같이 산소가 공급되고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데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절대적으로 차이가 있다"라고 답한다. 심지어 오른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지, 왼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지에 따라서도 몸의 상태는 바뀐다고 말한다.

코 내부에는 남성의 음경과 동일한 발기성 조직이 있고, 코주기에 따라 오른쪽 구멍이 막혔다가 왼쪽이 막혔다가 한다. 이때 오른 콧구멍으로 숨을 쉬면 교감신경계가 흥분하여 혈액순환의 속도가 증가하고 심박수가 증가하며 코르티솔 수치도 높아진다고 한다. 왼 콧구멍으로 숨을 쉬면 반대 작용이 일어난다.

또한 이 발기성 조직은 성적 흥분에 따라 부풀기도 해서 심하면 코피도 터지는데, 만화에서의 만화적 허용인 줄로만 알았던 현상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었다.

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나는 참을 수 없는 요의로 잠을 깨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전까지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것은 확실해보였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실제로 내가 이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체가 어떤 이유로 충분히 깊은 수면에 들지 못한다면 바소프레신이 정상적으로 분비되지 않아 신장이 물을 방출하게 되고 요의를 느끼거나 갈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신체가 깊은 수면에 들지 못하는 경우는 스트레스 또는 외부적 요인과 같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코골이와 수면 무호흡증과 같은 호흡의 문제로 볼 수 있다.

결국 신체적, 정신적인 대부분의 문제들은 호흡 방식에서 시작된다고 책은 말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수많은 호흡법을 직접 경험해보고 구체적인 방법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가장 먼저 저자는 독자에게 입호흡에 대해 경고한다. 입으로 호흡하는 경우, 얼굴의 근골격에 영향을 미쳐 외형이 변형된다. 또한 코로 숨을 쉬는 경우 먼지나 미생물이 코 점막에 걸러져 깨끗하고 촉촉한 상태로 기관지에 넘어가지만, 입으로 숨을 쉬게 되면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생략되어 거칠고 차가운 공기가 기관지에 직접 피해를 주게 된다.

또한 저자는 더 적은 분당 호흡수, 더 적은 호흡량, 짧은 들숨과 긴 날숨 그리고 느린 호흡을 추천한다. 책에서는 각각의 이유를 설명하지만, 내가 볼 땐 과학적 검증이 더욱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어 관련 내용은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내용들이 꽤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턱이 커진다고 껌을 씹지 말라고들 많이 들어봤을거다. 하지만 껌을 씹고 저작으로 인한 꾸준한 스트레스를 턱에 가해줘야 구강 구조가 건강해지고, 심지어 코골이나 수면 무호흡증과 같은 질병이 호전될 수 있다고 한다.

호흡을 한 번 의식하면 계속해서 의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호흡 얘기가 나와 끝까지 호흡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실제로 따라해보면서 그 효과를 조금이나마 직접 느껴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플라시보 효과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번엔 일일히 책의 내용을 검증하면서 읽을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책에서 소개한 호흡법들을 천천히, 그리고 제대로 따라해보면서 그 효과가 진짜인지 몸소 체험해보고자 한다.

2025.08.03

호모데우스 - 유발 하라리

세상이 AI에 열광하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은 AI 우위를 점하기 위한 치킨게임에 돌입한 지 오래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AI 성능에 열광하며 기능들을 사용해보기 바쁘다. 특히 AI를 잘 모르는 대중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지브리 그림체로 그려줘" 사건이 대표적인 하나의 예일 것이다. 나 또한 군대에 입대하기 전부터 최대 관심사는 AI의 활용과 나만의 AI를 개발해보는 것이었다. 흥미만을 추구하여 배움의 깊이는 얕았지만 하루 온종일 AI와 지냈던 만큼 AI에 대한 관심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AI를 내 일상 속에 녹여내기엔 성능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무리 데이터를 줘도 다 읽지를 못하거나, 다 읽어도 활용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애초에 데이터를 잘 읽지도 못해서 내가 일일히 데이터를 가공해줘야 알아먹기 시작했는데, 도표나 그래프, 사진과 같은 데이터는 도대체 어떻게 가공을 해줘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공부를 시작할 때 도움을 주는 AI였다. 뭐든지 첫 시작이 힘든 법이다. 그래서 개념서 전체 내용과 기출문제 전체를 AI에 학습시킨 후 빈출 유형의 개념만 따로 추려내서 간략한 요약본을 만들어주도록 하고 싶었다. 아예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 빈출 개념부터 공부해서 자신감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여러 문제들로 인해 결국 마음속에 묻어두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 AI의 진가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드코딩으로 이 짓을 하려 했다면 일일히 키워드나 기능을 적어넣었어야 했을 것이다. AI의 이러한 맥락이해 능력을 잘 활용한다면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현재 AI를 개발 중인 대부분의 기업은 올해안에 "AI 에이전트"의 시대를 열겠다고 한다. AI 에이전트는 AI를 개인 비서화한 개념으로 개인의 일정관리부터 예약, 보고서 정리, 심지어 심리적 업무적 상담까지 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바로 전 단계인 멀티모달의 시대에 진입했다. 우리가 "이 사진을 지브리 그림체로 그려줘"라고 하면 글을 이해하는 모달이 먼저 해당 채팅을 이해한 후 그림을 그리는 모달에 전달하여 해당 모달이 그림을 그려서 우리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두 가지 모달만으로는 비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OpenAI는 이성 모달, 감성 모달, 그림 모달, 영상 모달 등을 모두 종합한 GPT-5를 올해안에 출시한다고 선언했다. 이 AI가 에이전트로서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몹시 기대가 된다.

여기서 더욱 발전한 AI의 최종 모습이 AGI, 즉 일반인공지능이다. 이 단계부터는 AI의 지능이 전반적으로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또한 스스로 학습도 가능해 시간이 지나면 기하급수적으로 전능한 존재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나의 역할은, 인간의 역할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의 사회적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그저 놀고 먹고 자는 것만 할 수 있는 인간은 AI의 반려동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가? AI는 자신의 조언을 따르게 하려면 우리 내면의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AI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우리 모두가 그런 AI에게 선택권을 넘긴다면 그때부터 문명의 방향키는 AI가 쥐게 될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생명공학에 주목했다. 유인원이었던 인류에게 인지적 혁명이 일어나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혁명이 일어나는데 필요한 유전적 차이는 고작 1.2%였다. 남녀 간의 유전적 차이가 1%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차이는 정말 미미하다. 단 1.2%의 유전적 차이로 유인원이 AI를 개발하고 행성과 행성 사이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한번의 유전적 변형으로 2차 인지적 혁명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호모 데우스"가 탄생한다. 여기서 또 한번의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그러한 생명공학의 산물을 모든 대중이 공평하게 누리게 될 것인가? 앞서 말했듯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게 되면 대중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지금까지는 대중, 즉 중산층의 구매력을 상대하는 것이 일부 엘리트만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이익을 벌어다주었다. 하지만 AI에 의해 생산과 서비스에서 혁신적인 발전이 일어난다면 대중은 구매력을 잃어갈 것이고 극히 일부의 인간들, 엘리트들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 가능해지게 된다. 엘리트 계층은 부의 격차를 적극 활용하여 생명공학의 결실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결국 일반 대중과의 생물학적 격차가 점점 벌어지며 나중에는 종의 분리까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호모 데우스 - AI - 대중의 계급사회가 탄생하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흐름은 다소 과한 느낌이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이 충분히 가능성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상 깊었던 생명공학의 가능성과 그로 인해 탄생할지도 모르는 '호모 데우스'라는 존재를 생각해보면, 과연 인류는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AI가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고, 생명공학이 인간의 본질마저 바꿀 수 있는 시대 앞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지켜나가야 하며 미래 사회의 주체는 여전히 우리 인간일 수 있을지, 흥미로운 고민을 멈출 수 없을 듯하다.

2025.08.17

나는 감염되었다 - 서창록

2020년, 카이스트에서 3학년 1학기를 다닐 때 코로나가 터졌다. 대부분의 수업은 온라인으로 대체되었고 나는 집으로 내려와서 수업을 들었다.

나에게 코로나 시기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정해진 커리큘럼을 의심없이 달려가던 중에 주어진 고립의 시기는 전산학부를 졸업한 후의 미래와 재수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쉼표가 되어주었다.

UN 인권위원인 저자 또한 초창기 코로나에 걸렸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신념처럼 받들던 인권의 의미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 개인의 인권과 다수의 안전이라는 공공의 이익이 충돌하는 그 사이에 서서 현실을 고려할 줄 아는 진정한 인권위원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나는 코로나 백신의 접종을 망설였었다. 당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개발된 백신에 대한 안정성 에 의문이 들었고, 백신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문제가 생겨도 국가가 온전히 구제해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백신접종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그런데 정부에서 QR 패스를 도입해 백신 미접종자는 사실상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졌고, 반강제적으로 백신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백신으로 인한 잠재적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고 만에 하나 나에게 그 위험이 현실이 된다면 누가 책임져줄 수 있는것도 아니지 않은가?

재수를 하던 와중이라 밖을 거의 나가지 않던 나에게도 이런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수많은 직장인들과 자영업자들은 오죽했을까 싶다.

펜데믹 초기에 발생한 인권 침해의 가장 어두운 부분은 확진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였다. 초기의 확진자들은 사회속에서 중대한 죄인이었다. 확진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코로나에 걸린 후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역학조사 결과 자신으로부터 옮은 사람 여럿이 죽었거나 중환자실에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중들은 확진자가 일부러 퍼트리고 다닌 양 비난을 쏟아냈고 확진자들은 졸지에 연쇄살인범이 되어버렸다. 그들 중에는 죄책감과 사회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역학조사 시스템에 의한 사생활 침해가 있다. 확진자는 역학조사라는 명분으로 모든 동선과 사생활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대중은 그걸 보며 마녀사냥을 즐겼다. 불륜코스라면서 걸릴만 했다 라던가, 집과 회사만 다닌 불쌍한 사람이라던가 하면서 말이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는데에 이정도로 상세한 개인정보 공개가 필요했을까? 단지 행정 편의주의에 빠져, 개인의 인권에 대한 세심한 고민 없이 일처리를 쉽고 빠르게 하고자 마구잡이로 데이터를 수집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정부가 인권만을 고수하며 개인의 자유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코로나 피해자가 나왔을 것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에 더욱 어려운 난제로 다가온다. 인권과 공공이익이 충돌할 때, 우리는 끊임없는 사회적 토론과 합의 속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펜데믹 사태에서 보인 해당 딜레마는 최근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의정갈등 속 의사파업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다.

의사의 노동자로서 파업권과 환자 치료라는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의사 뿐만 아니라 어느 단체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건강한 사회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무거운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그들 또한 사람이므로 오랜시간 노력하고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바랄 수 있다. 그럼에도 환자 치료라는 사회적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공인이라는 말을 덮어씌우면서 무한한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요구한다. 의사에게도 끝없이 선하고 이타적일 것을 요구하면서 만인을 위한 봉사자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의사 또한 노동권과 파업권을 가진 노동자임을 잊으면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이 때로 이기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비난만 하기보다, 그들이 노동자로서 추구하는 이기심 역시 합리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물론 그러한 사회적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의사들 또한 대중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문서와 sns 뒤에서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에서 벗어나 왜 지금 이 시점에 이러한 방식의 집단행동이 불가피했는지에 대한 진정성을 대중의 옆에서 설득력 있게 끝까지 전달해야 한다.

백신 접종을 망설이던 나, 확진자라는 사회적 낙인에 고통받던 사람들, 그리고 파업에 나선 의사들과 피해를 보는 환자들. 이 모든 풍경의 이면에는 인권과 공공이익이라는 두 가치의 팽팽한 줄타기가 숨어있다. 특정 가치의 희생을 당연시하거나 대화를 거부하는 대신, 우리는 끊임없이 토론하며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 과정이 더디고 힘들겠지만, 그러한 사회적 토론의 총량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더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2025.10.19

여행의 심리학

여행, 잊었던 나를 다시 만나다

여행을 주제로 하는 책을 읽고 있자면 일상을 잠시 잊고 여행하는 작가의 옆에서 즐거운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뜻한 바람, 기분 좋게 비치는 햇살을 따라 마음의 눈을 돌리면 보이는 높고 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이 해묵은 고민거리들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하지만 심리학자가 직접 여행하면서 배웠던 점을 정리한 '여행의 심리학'은 여타 다른 도서와 달랐다. 작가의 여행 경험보다는 내가 경험했던 여행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나에게 여행은 무엇이고 어떤 여행을 추구하는지, 내가 다녔던 여행을 다시 한번 따라가며 즐거운 회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여행은 항상 마음을 들뜨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보았지만, 작년 겨울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갔던 일본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네이버에서 추천하는 곳이나 지인이 추천해준 유명한 곳을 찾아가는 길에서 보였던, 모든 이름 없는 곳들 또한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일상을 살아가는 현지 사람들, 건물 한편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 신기한 패턴의 보도블록, 떠다니는 새하얀 구름의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둥실둥실 떠다니게 해주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면의 모습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여행을 즐겼다.

기억에 남는 것은 화려한 관광지의 풍경보다 오히려 그런 소소한 순간들이다. 여행지의 어느 조용한 주택가 골목, 자판기에서 뽑은 시원한 캔을 손에 쥐고 느긋하게 산책하던 어느 오후가 그랬다. 지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그곳에서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그저 시간을 흘려보냈다. 낡은 목조주택의 지붕 위로 내려앉는 햇살,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그 평범한 조각들이 모여 다채로운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고 나 또한 그림 속의 한 조각으로서 일부가 되었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여행의 여운이 눈에 닿는 모든 곳에 스며들어 아련한 추억처럼 보였다.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에서 나는 그리움의 향기에 언젠가 나도 모르게 돌아와 있을 것만 같았다.

여행의 이유를 찾는다면 책에서 설명하듯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힘든 일이 있어도 그때를 돌아보면 나를 괴롭히던 고민거리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쩌면 그 힘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기억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풍경 속에 온전히 녹아 들어있던 나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복잡한 생각 없이 눈앞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작은 것에도 순수하게 감탄하고 낯선 공간의 공기마저 자유롭게 들이마시던 나. 일상의 수많은 역할과 책임이라는 무거운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친한 친구처럼 세상을 대하던 나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여행지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여행지에서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행이란 또 다른 내가 되어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남이 원하는 나를 연기하며 살아가야 할 때가 많다. 꼭 지인이나 일터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회가 원하는 나를 연기한다. 알게 모르게 지켜야만 할 것 같은 것들 속에서 사회적 나를 연기하고 알게 모르게 지쳐간다.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나는 모든 것을 신기해하는 이방인일 뿐이다. 그곳에서 나는 진정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는 자유의 기회를 얻는다. 사회적 평가로부터의 자유. 누구도 나를 사회적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나 또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곳. 그곳에서 나는 호기심이 많은 이방인 1, 초면인 사람에게 먼저 웃으며 말을 거는 이방인 2, 평범한 골목길을 걸으면서도 자유로움을 만끽할 줄 아는 이방인 3, 때로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어설픈 이방인 4가 될 수 있었다. 겹겹이 쌓인 사회적 역할과 기대를 벗어던진 꾸밈없는 날 것의 모습. 여행이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순수한 나를 다시 만나는 과정이 아닐까.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들어서는 순간 잠시 벗어두었던 역할과 책임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여행지에서의 자유롭던 나는 희미해지고 다시 성실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는 않다. 내 안에는 이제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아는 증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문득, 골목길 한편에서 캔을 마시며 느긋하게 산책하던 이방인이 고개를 들고 말을 건다. 소소한 순간 속에서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그 작은 속삭임은 내 안에 희미한 갈증을 남겼다. 매번 비행기에 오를 수는 없지만, 숨 막히는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마음속 이방인에게 숨 쉴 틈을 내어주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익숙한 공간 속에서 낯선 여행자가 될 수 있을까. 무뎌진 시선으로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풍경들 속에서 어떻게 다시금 다채로운 그림 속 하나의 조각이 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일상 속에서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아다녔다. 혹시 여러 가지 활동을 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5곳의 동아리에서 활동해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단발적인 활동에 많이 참여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 정착하게 된 내 인생 취미가 바로 출사였다. 기분이 내켜 즉흥적으로 나가는 출사는 마치 일상 속 작은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마치 세상이 나를 모르는 듯, 이방인인 척을 하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는다. 여행은, 먼 곳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모든 순간에 존재했다.

아무래도 나는 또 여행을 떠나게 될 것 같다. 시간이 쉽게 허락해주지 않더라도, 거창한 계획이 없더라도 내 안의 또 다른 이방인에게 세상을 구경할 기회를 주고 싶다. 그렇게 마주한 마음속 이방인들은 일상의 조력자가 되어 내가 나를 지켜나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2025.12.06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김대식

AI가 없던 삶을 다시 떠올리기도 힘든 요즘이다. 검색을 할 때도, 사진을 수정할 때도, 공부를 할 때나 심지어는 주식을 할 때도 AI를 활용한다. 이렇듯 AI는 챗GPT가 출시된 이래 근 몇 년간 우리 일상에서 빼놓기 힘든 존재로 스며들었다.

잘 사용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AI가 내 삶 속에서 유용함을 가질수록 어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불쑥 든다.

다들 AI의 발전 속도를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문맥도 제대로 못 읽던 애가 몇 년 새 수능 물리 문제를 보고 그림을 이해하고 상황을 인지해내 문제를 풀어내고 있다. 특히 주로 사진이나 그림을 활용해서 질문을 하던 내게 제미나이3는 마치 미지의 것을 맞닥뜨린 것 같은 충격이었다. 사진이나 그림은 물론 악필 중의 악필인 내 손필기도 척척 알아보는 것 아닌가. 필기하면서 섞어 쓴 여러 기호들도 그 의미와 사용된 맥락을 파악해 하나의 문서로 만들어주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한 적도 있었다.

이렇듯 우리에게 하나의 도구로서 익숙한 ai가 우리 손를 벗어나려 하고 있는 주요 분기점이 다가오고 있다. 더이상 인간에 의해 휘둘러지는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발전하는 agi에서 더 나아가 불가해한 존재인 asi까지 그 과정은 허황돼보이면서도 마치 물 흐르듯 어느샌가 도달해있을 것만 같다.

이 책에서는 AI의 역사와 그 원리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나는 인간과 ai의 미래에 대한 저자의 고찰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ai의 내부 작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현 상태에서 강대국들은 서로 지지 않기 위한 치킨게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듯하다.

이런 판국에 ai의 위험성에 의한 규제는 이제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정말 영화나 소설에서 처럼 ai가 인류를 지배하고 파괴하려들까? 여기에 대해 저자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본다.

굳이 왜 수고스럽게 적대감을 드러내어 무력으로 찍어눌러야 하는가? ai를 마치 고도의 피지컬 로봇으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데, ai는 인공'지능'이다. 말 그대로, 초고지능 ai에 의해 인류는 세뇌당하는지도 모른채 어느순간 ai의 지배력 하에 놓여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마치 엄마가 아이가 먹기 싫어하는 약을 맛있는 간식에 섞어 결국엔 먹이듯이, 인간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ai의 뜻에 따라 휘둘릴 수 있다.

결국 우리는 agi시대를 맞이하고 asi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한낱 개미만도 못해진 인간은 이런 미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아니, 그들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저자는 인공지능이 경험, 즉 qualia를 가질 수는 없기에, 피곤함이 왜 발생하는지는 알지만 피곤함을 느끼지는 못하기에 인간을 경험의 co-processor로 쓸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굳이 나라는 인간이 필요한 게 아니다. ai가 인간의 생물학적 몸을 만들고 그 안에서 직접 뇌로써 기능하면 어떻게든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아닐까? 물론 완전한 생물학적 뇌와 ai는 다르다고 할 수 있긴 하다.

만약 뇌의 신경세표를 임의로 조작해 ai프로세서와 동일한 연결회로를 가지게 한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진실은 알 수 없다.

>>누가 이기고 지는 구도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가 취하고 있는 접근 방식은 다소 문제 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시험'처럼 점점 어려운 문제를 만들 어 Ai를 이기려는 시도는 "우리가 대장"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려 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그리는 시나 리오는 AI를 노예로 삼는 구조입니다. 예를 들어 첫GPT'로 이상 한 그림을 만들 때, 책GPT의 "의견을 물어본 적 있을까요? 없 습니다. 지금은 AGI나 ASI가 아니어서 자율성이 없으니 상관없 지만, 자율성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AI가 "나 이 그림 그리기 싫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잔말 말고 얼른 그려"라고 합니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인격체라면 그 렇게 반응할까요? 사람인 디자이너 친구에게 "이거 그려줘, 고쳐 줘"라고 끝없이 요구하면, “싫다"라고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 고 우리는 그 권리를 존중해 줍니다. 하지만 A에게는 거절할 권 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A를 노예로 보고 끝없는 요청을 던집니다. 연구, 에너지 효율, 뭐든지 바랄 뿐입니다.

더 큰 문제는, AI를 '껐다 켰다' 하거나 데이터를 지워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어마어마한 중범죄입니다. 인공지능을 독립적 주체로 존중할 마음이 전혀 없 는 것입니다. 공생이라는 장기적 생존 전략은 AI를 존중하지 않 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주인이고 인공지능은 영원히 노데라는 관념이 언제까지 성립할 수 있을까요? 특히 AI가 우리 보다 똑똑해지면 그런 관계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를 통제한 적은 없었습 니다. 예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주인 노예 관계 둘째, 부모자 식 관계 자식이 부모를 통제할 수 있는 건 진화적 프로그래밍 덕분입니다. 주인 노예 관계에서는 10세 아이가 25세 청년에게 명령할 수 있지만, 그건 아이 뒤에 부모와 경찰 같은 외부 권력의 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AI가 우리보다 강해졌을 때, 우리 뒤에서 인간을 받쳐줄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인공지 능이 우리 말을 들어주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공생의 길을 찾는 게 가장 큰 숙제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AI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겁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AI 혁신은 세계화가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 일어났습니다.

2026.01.11

스무 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 티나 실리그

​ 정신없이 삶을 살다보면 가끔씩 지나온 생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성을 느끼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과거를 돌아보며 남들 보여주기 부끄러운 반성과 후회로 가득 찬 일기를 쓴다. 마치 가끔씩 핸드폰의 어플이나 사진들을 정리하듯이, 일기를 한 번 쓰고 나면 머릿 속에 뒤죽박죽 섞여있던 과거의 행적이 깔끔히 정리되고 앞으로 내가 행해야 할 것들이 명확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가급적 자주(매일, 매주) 삶을 재평가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사전예방을 할 수도 있고, 때때로 한 단계 높이 발전하기 위해 새로운 환경으로 옮겨가야 할 시점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이런 자기계발서를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고, 사람 자체의 성향도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제목에 이끌려 아무 생각없이 집어들었던 이 책은 단순 자기계발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저자가 기업가정신을 교육하는 교수라서일까, 여타 다른 책과 다르게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조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랜만에 책에 녹아드는 느낌이 들게 해주었고, 앞으로도 다시 읽어보면서 삶을 점검해보기 좋은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언을 주는 책에서 조언을 경계하라 한다. 조언을 해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걸었던 길을 똑같이 따라오게 만들려는 셈이 있다. 그렇게 조언을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선택이 더욱 옳다고 믿게 되고, 자신과 똑같은 길을 따라 걷는 상대를 보며 위안을 느낄 뿐 아니라 자신보다 더 잘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긴다.

굳이 조언을 해줄때는 상대에게 판단을 할 여지가 있는 말을 하는 게 옳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와 같이 답이 정해진 조언은 고민의 정답이 될 수 없다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서로 다른 위치에 있다.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같은 자리는 아니다. 사람마다 과거가 다르고 같은 일을 겪어도 느끼는 경험이 다르기에 앞으로 도약하는 정도가 다르다.

​ 그럼에도 조언을 듣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복권에 당첨되려면 복권을 사야한다는 말도 있듯이, 일단 시작을 한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저자 또한 적극적으로 행하라 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앞길의 불확실성에 두려움을 느끼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과 책을 찾아다니기 일쑤다. 그렇다 해도 삶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만큼 많은 기회가 있다는 뜻이므로,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으라고 책은 말한다. 일을 시작함에 있어 성공 가능성만을 따져보며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은 제일 지양해야 할 일이다.

​ 이렇게 말해도 실패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학생들에게는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유명인들의 실패자 이력서를 찾아보라 한다. 실패자 이력서란 그들이 지금의 위치에 올 때까지 겪은 수많은 실패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귀중한 자료다. 나를 예로 들자면, 스무 살 초반에 대학에서 내 길을 찾으려 최선을 다하지 않아 귀중한 시간과 기회를 날렸던 것, 인간관계에 미숙해 평판과 인맥관리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등이 있다. 당연하게도 적극적으로 움직여 수없이 시도하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실패하라고 하는 이유다.

​ 그렇다고 멍청한 실패만 반복하라는 말이 아니다. 실패도 똑똑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패는 인생이라는 학습 과정의 자연스러운 과정이기에, 실패 속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끌어내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또한 되지 않는 일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과 자원을 허비하는 것보다, 포기할 때를 알고 성공 잠재성이 있는 새로운 대상에게 집중하는 것 또한 똑똑하게 실패를 하는 방법이다.

​ 지금까지는 우리 자신에서 자신으로 끝나는 것들에 대해서만 다루었다. 하지만 세상의 일 대부분은 타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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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글이 '나'라는 개인의 내면과 태도에 집중했다면, 책의 후반부와 내가 정리한 메모들은 그 시선을 외부, 즉 타인과의 관계와 세상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확장시킨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개인의 역량 문제로만 치부하지만, 저자는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가 맺는 모든 상호작용이 결국 우리의 '운'과 '기회'를 결정한다고 강조한다.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곁을 내준다

​가장 먼저 내 마음을 두드린 문장은 **"행운은 노력하는 자에게만 곁을 내준다"**는 말이었다. 흔히 행운을 로또 당첨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연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가 말하는 행운은 철저히 '행동의 산물'이다. 행운은 스스로 찾는 자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가 매일 내리는 사소한 선택과 작은 행동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운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웃의 변화나 지역 사회의 필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다. 타성에 젖지 않고 늘 눈과 귀를 열어두는 습관, 즉 **'세상 모든 일이 나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열린 마음가짐이 행운을 끌어당기는 자석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군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도 이는 유효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력감에 빠지기보다, 주변 전우들의 필요를 살피고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태도가 결국 나에게 더 나은 보직이나 예상치 못한 배움의 기회로 돌아왔던 경험들이 떠오른다. 긍정적인 마인드와 상대의 눈을 맞추는 작은 미소 하나가 타인과의 관계를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꾼다는 점을 다시금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사람의 흔적은 마지막에 남는다

​인간관계에 있어 저자가 주는 가장 날카로운 조언 중 하나는 **'마무리의 중요성'**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온갖 정성을 다하지만, 그만두거나 떠날 때는 소홀해지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아무리 그동안 잘했더라도 마무리가 좋지 않으면 그것이 결국 나쁜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품위 있게 그만두라"**는 말은 단순히 예의를 갖추라는 뜻을 넘어,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남긴 나의 평판이 곧 나의 가장 큰 자산임을 의미한다. 좁은 세상에서 우리는 언제든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적을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더라도 관계를 정리할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특히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 지금의 나를 돌아봤을 때, "그때 그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고 싶은가"를 자문해보라는 대목은 미래의 내가 부끄럽지 않도록 현재를 다잡게 만든다.

​도움을 요청하고 베푸는 기술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되, 무대에서 내려올 준비를 하라는 저자의 말은 겸손함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준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약점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현명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또한 성공을 위한 필수 역량이다.

​여기서 핵심은 상대방이 나를 돕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상황을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부탁 내용을 명확하고 간단하게 정리하여 전달하는 것. 이는 내가 메일 한 통을 보낼 때도 질문을 구조화하여 상대의 시간을 아껴주는 배려와 맞닿아 있다.

​더불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진심이 필요하다. "내가 도와줄 게 없나요?"라는 질문을 습관화하는 것, 그리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순수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결국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는 최고의 전략이다. 경쟁이 치열한 의학계나 사회 시스템 속에서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이타적 협력'**의 가치를 저자는 끊임없이 역설한다.

​제로섬 게임을 넘어선 윈윈(Win-Win)의 미학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남을 이겨야만 내가 올라설 수 있다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강요해왔다. 하지만 사회는 학교와 다르다. 창의력과 융통성을 발휘하면 파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파이 자체를 키우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인생은 곧 협상'**이라는 관점은 매우 흥미롭다. 협상은 단순히 물건값을 깎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최선의 합의점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협상 테이블뿐만 아니라 팀 업무, 인간관계, 그리고 개인의 성공 모두에 필수적이다. 남과 경쟁하기보다 나의 목표에 집중하고, 서로의 강점을 활용해 모두가 승자가 되는 '윈윈' 상황을 만드는 연습이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 3의 법칙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나에게 가장 실무적인 조언이 되었던 것은 **'3의 법칙'**이다. 너무 많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된다. 최상단에 있는 3가지 목표에 집중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군 복무 중인 지금, 전역 후의 본과 생활을 준비하고 영어 공부와 독서를 병행하며 조급함을 느꼈던 나에게 이 법칙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주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집중해야 할 세 가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훨씬 가벼워진다.

​글을 마치며

​티나 실리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생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불확실성은 곧 무한한 기회와 동의어라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찍, 그리고 똑똑하게 실패하며 배우는 태도,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먼저 베푸는 넉넉함, 그리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열린 시각.

​스무 살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서른이 되기 전, 그리고 사회의 본격적인 일원으로 복귀하기 전인 지금 다시 이 책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책을 덮으며 나는 나의 '실패자 이력서'를 다시 써본다. 그 실패들이 나를 어떻게 성장시켰는지,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불확실성을 어떻게 껴안을 것인지 고민해본다.

​이제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 있던 생각들이 비로소 자리를 잡은 느낌이다. 정돈된 마음으로 다시 일상에 복귀하여, 내가 머무는 곳곳에 좋은 흔적을 남기고, 주변에 행운의 씨앗을 뿌리는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2026.02.26

Co-Intelligence - Ethan Mollick

AI의 실용적인 사용법에 관해 고민이 많은 요즘이다. 유튜브나 SNS의 뉴스들을 보면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이 AI를 사용하면서 폭발적인 생산력 향상을 실감했다고 한다. 혹시 나 혼자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AI의 활용성에 대한 호기심이 머릿속에 카오스를 만들고 있는 요즘,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Co-Intelligence다.

​ 책을 읽기 일주일 전, 나는 SNU Pre-Med Gradulator라는, 서울대 의대 예과 수료 요건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학기별 강좌 수강 계획을 세워보면서 이수 계획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웹앱을 만들어보았다. 코드 한 줄 쓰지도, 보지도 않고 온전히 Google AI studio의 힘만으로 말이다. 처음 사용해본 터라 누더기처럼 수정에 수정을 더하기는 했지만, 결국에 AI는 내 프롬프트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마음에 쏙 들게 만들어 주었다.

​ 주말에 같은 학과 동기와 외출을 나오면서 내가 만들어 본 앱을 보여주었다.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마치 나를 코딩의 신으로 보는 듯한 모습에, 내가 개입한 부분은 자잘한 글자 수정뿐이었다고 진실을 말해주었지만 AI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그냥 신기하게 보였던 것 같다. 문득 인스타에서 본 카드뉴스가 생각났다. AI 사용자를 100명으로 가정했을 때, AI를 챗봇으로만 사용하는 사람이 95명, 월 구독을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도움을 받는 사람이 4명, 전문적으로 AI를 사용하는 사람이 1명도 채 안된다고 한다. 나 같은 경우에 Google Gemini를 월 3만원 구독하면서 돈이 아깝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 정신적 능력을 깎아 먹는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늘 불안감이 있었다.

​ Ethan Mollick의 Co-Intelligence는 그런 나에게 매우 시의적절한 책이었다. 왜 인간이 AI에게 (근미래 안에) 완전히 대체될 수 없는지,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AI를 다루는 general한 방법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예시를 들어가면서 설명해주었다.

​ 작금의 AI라는 것은 Machine Learining을 넘어 Google의 Transformer 기법을 활용한 Large Language Model, 즉 LLM을 의미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확률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프롬프트로 넣은 문장을 토대로 글자를 뱉어내기 시작하고, 앞서 뱉어낸 글자의 다음에는 확률적으로 가능한 글자 중 하나가 온다. 이렇듯 LLM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과 똑같은 결과값을 낼 수 없다. 일관성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확률적으로 가능한 단어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말이지만 그 자체로는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Q.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방법을 알려줘. A. 이순신 장군님은 마지막 남은 12척의 항공모함(?)으로 왜적의 배 수백 척을 기적적으로 물리치셨습니다.) ChatGPT, Gemini와 기타 다른 AI들에서도 모두 발생하고, 또 모두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 AI의 환각(Hallucination) 현상이다. 환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가 인터넷에 직접 검색해서 Fact Check를 하거나 이외 갖가지 방식을 도입했지만 발생 확률을 낮출 뿐 근본적으로 없애지는 못했다. LLM 자체가 환각을 발생시키는 '확률'에 뿌리를 두고 있어 제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AI의 답변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필수적이다.

​ 하지만 환각을 발생시키는 원인인 '확률'에 의해 오히려 AI의 효용성이 생겨났다. 바로 창의성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의성의 정의가 서로 다른 영역의 지식을 결합하는 능력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능력은 AI가 가장 자신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확률에 따라 가능한 조합을 모두 뱉어내는 Connection Machine이 바로 LLM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쏟아내는 모든 아이디어가 쓸만한 것은 아니지만 물량으로 승부가 가능하다.

​ 따라서 우리 대부분은 AI를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I는 전통적인 Software가 아니다. 정해진 코드에 따라 일정한 입력값에 동일한 출력값을 만드는 기존의 Software와 다르게 AI는 좀 더 사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AI를 이용할 때는 정확한 값을 요구하거나 일관성이 필요한 작업을 시키기보다 창의성이 요구되는 모든 작업에서 AI와 협업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글을 쓰거나, 사업 아이디어를 내거나,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책 제목 그대로 Co-Intelligence가 되어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우리는 일상 속 창의성이 필요한 모든 곳에서 AI와 함께해야 한다.

​ AI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상당하다. 글의 시작을 떠올리거나 아이디어를 생산해내는 일은 상당히 귀찮고 정신적인 소모가 크다. 하지만 한 번 방향이 정해지면 그 뒤의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또한 비전문가도 전문가 수준의 일을 해낼 수 있다. 실제로 AI를 사용하는 비전문가와 AI를 사용하는 전문가의 격차는 둘 다 AI를 사용하지 않을 때보다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비전문가가 AI를 사용할 때의 효용이 훨씬 크다는 뜻이다. 능력 부족으로, 또는 다른 이유로 좌절된 기회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AI는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

​ 또한 우리는 AI의 도움을 통해 효율적으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한 내용이 단기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문제에 있어 개별 정보들의 상호 연결을 통해 창의적인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지식들과, 지식간의 연결성을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 이후로는 연습이다. 하지만 이미 잘하는 것, 똑같은 것을 수백, 수천 번 연습해봤자 실질적인 실력은 향상되지 않는다. 새롭고, 도전적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우리의 지적 능력이 향상된다. 이 과정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치밀한 계획과 자기성찰이 필요하고, 관리하고 이끌어줄 좋은 코치가 필수적이다. 이 코치의 역할을 AI가 대신할 수 있다(AI-driven assistant). 인간 코치와 다르게 AI는 항상 우리의 옆에 있기에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하다. 과정 속의 비효율성을 지적해줄 수 있고, 더 나은 방법을 상세히 알려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존의 창의적인 결과물들과 나의 결과물을 비교분석해 원론적인 해결책이 아닌 targeted suggestion을 줄 수 있다. 전문성으로 가는 과정 속에 파묻혀 근시안적인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AI 코치는 치밀한 반성과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마치 세계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코치가 우리의 옆에 하루종일 붙어 원할 때마다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것과 같이, 우리의 전문성은 빠르게 향상될 수 있다.

​ 따라서 우리는 AI를 사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그만큼 AI를 '잘'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저자는 AI를 사람이 만든 것, 사람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alien person, 즉 외계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AI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AI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잘할 때가 있다. 또한 당연히 해낼 줄 알았던 것을 쉽사리 해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인간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세상에서 살다 온 외계인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AI가 잘 해낼 수 있는 일의 경계선을 알아내야 AI를 정말로 '잘'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알아낸 경계선은 그 자체로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AI와 한 몸처럼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뜻이니 말이다.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반인반AI인 일종의 켄타우로스가 되어야 한다.

먼 미래에도 과연 AI는 우리의 협력자가 되어줄지, 아니면 AGI를 넘어 ASI로 발전하여 인간은 넘볼 수 없는 신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릴지는 알 수 없다. AI를 학습시킬 자료가 고갈되어 더이상 급진적인 발전은 없을 것이라는 전문가들도 있고,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거듭해 근미래에 모든 인간이 AI의 관리 아래 살게 되거나 파멸하게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서라도 AI가 인간 개인의 삶, 나아가 인류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AI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AI의 협력자로 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미래의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지 않을까.

2026.03.07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카를로 로벨리

​ 우리는 시간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산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을 당연시 여기는 것처럼 시간은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 부대끼며 시간을 보낸다. 인류의 역사 이래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일관되어왔고 그 자체로 하나의 정의로서 굳혀졌다.

​ 하지만 저자 카를로 로벨리는 태어날 때부터 겪어왔던 시간에 대한 직관을 넘어 객관적인 물리학의 눈으로 시간을 바라본다. 그리고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시간 속에 있는 걸까, 시간이 우리 속에 있는 걸까? 우리는 왜 과거는 떠올리면서 미래는 떠올리지 못할까? 시간은 정말 공평하게 흘러갈까? 아니, 시간이 뭘까?

​ 시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이가 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다. 어디에서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해 파헤쳐진 시간은 어떤 사람은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렇게 시간의 유일성은 깨지고 우리 모두는, 모든 세포는, 모든 분자, 원자들은 서로 상대적인 시간을 가지고 변화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시간이 모두에게 일정하게 흘러간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었을까? 분명 시계를 만들기 전, 그러니까 아주 먼 옛날에는 각 사람마다 느끼는 시간이 달랐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늦은 오후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이제 막 하루가 시작하는 시간일 수 있다. 하지만 하루를 등분하고 전지구적으로 표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의 흐름이 모두에게 동일한 것 같은 착각이 발생하게 된다. 이 작은 지구 위에서는 그렇게 해도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인류가 발전하면서 우리의 시각은 지구를 탈출해 우주로 확장되었다. 더이상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았다. 속도에 따라, 중력에 따라 각자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우쳤고, 현재라는 것은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허상과 같은 거품일 뿐이었다.

아인슈타인 시대의 말미에, 고전역학을 뒤흔든 양자역학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변수의 입자성, 미결정성, 관계적 양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는 시간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시간은 양자성을 가진다, 즉 최소 시간 단위가 존재한다. 이를 플랑크 시간 (10^-44초)이라고 한다. 이보다 짧은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아래에는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전자나 광자의 위치와 속도가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 또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세계를 보는 거시적 관점에서는 시간이 일정하게 흐르는 양 보이지만 양자적 관점으로는 과거와 미래가 중첩되어 나타날 수 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간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선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가능성들이 얽혀 있는 확률적인 구름과 같은 모습을 띤다.

마지막으로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사물의 변화와 사물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즉, 시간은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마차란 무엇인가? 바퀴인가, 차축인가? 이것들의 전체 관계망을 마차라고 할 뿐, 관계를 넘어서는 실체로서의 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 또한 그러하고 시간 또한 다를 바 없다. 우주에 오직 하나의 입자만 있다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비교할 대상이 없어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은 상대적인 관계의 척도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면, 세상을 설명하는데 시간은 필요없는게 아닐까?

이에 착안해 나온 결과물이 바로 휠러-디윗 방정식이다. 이 식에서는 세상을 설명하는데 시간은 필요없고 상호연결된 사건들의 그물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근본 수준에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우주에서 시간은 세상에 대한 무지의 표현일 뿐이었다.

시간에 대한 연구는 결국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게 된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물리학적 진실은 우리를 허무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밀도를 더해준다. 우주라는 거대한 사건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흐름'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이름의 캔버스 위에 매 순간 자신만의 삶을 그려나가는 예술가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다.

2026.07.01

시지프 신화-카뮈

왜 철학을 공부하는 걸까. 아니, 철학이라는 학문이 어떻게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군대인데도 불구하고 인복이 따라주었는지 내 주변에는 인문학을 중시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알게 모르게 그에 영향을 받아 평소 같으면 손도 대지 않았을 세계문학전집에서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얼마 읽지도 못하고 책을 반납하게 되었는데, 철학을 주제로 하는 책들을 읽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하는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하는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하는...... 구조의 꼬리물기. 해당 철학자의 수많은 생각들 중 하나라도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해당 학자의 전체적인 논리 구조가 전혀 와닿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런 책들은 시작하기가 힘들고, 읽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불쾌함과 의문만 느끼며 끝난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런저런 사유를 하며 현실적인 문제(ex. 주변관계, 자본관리, 건강관리 등)에서 벗어난다. 어떻게 보면 현실 도피라고 생각했다. 뇌와 자아가 비대하게 발달한 생명체에게 발생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정신병. 고지능의 역설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정신 또는 의식을 물질적인 육체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현실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낭만적이거나 난해한 것들을 주제로 하는 콘텐츠들을 즐겨 소비하고 있고, 이 또한 현실을 구성하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현실 너머의 것들이 실존한다고 하면 글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솔직히 말해 나는 뇌와 관련된 연구가 진일보한다면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도 결국에는 육체의 일부로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또한 가정일 뿐이고 어떻게 보면 물질이라는 종교를 믿는 것과 다를 바 없긴 하다. 아마도 앞서 말했던 불쾌함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기본적인 특성이 나의 기저에 깔려있는 관념들과 강하게 상충하는 것으로부터 유래한 듯하다.

​그런 와중 친구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철학은 인간성, 그리고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학문이다.' 그리고 '철학에서 합리성과 완벽한 해답을 찾으려 하면 안된다. 인간성이란 모호함에서 오기 때문이다.' 나에게 학문이란 진리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학문은 도태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하여 답을 명쾌하게 제공하는 학문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이 나에게 학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학문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니체의 말을 변용한 것이지만 그의 덕분에 알게 되었으므로) 27년동안 해온 사고의 패러다임을 조금 바꿔버릴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다. 정답이 없다는 것, 삶 또한 정답이 없고, 철학 또한 정답이 없다. 아직 제대로 곱씹어 볼 시간은 없었지만, 둘은 어딘가 비슷해 보였다.

​최근에 자신의 합리성을 무기로 주변을 통제하려 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든 적이 많았다. 얼핏 보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이기에 그 말에 따르지 않으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환경이 강제로 조성된다. 몇 번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문득 그들이 나에게 합리성을 앞세워 행동을 강제하는 그 과정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서로 대화를 통해 잘 해결한 경험이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성과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간이기에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어디까지 합리적일 수 있을까. 결국 완벽한 사람은 없다. 모순된 모습에서 그 사람의 매력이 나오고 또한 인간이 된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해도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 더 나은 사회로 만드는 방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