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말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단어만을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다. 책을 펴고 진정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글만 깨우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는 책에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우리가 앞서 체험한 경험이 책을 통해 정리되고 이해될 뿐이다. 그래서 너무 어릴 때 책만 읽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가 책을 펼쳐야 하는 이유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했던 내용 중 하나다.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사유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요즘의 나에게 가장 적절한 책이었다. 어지럽게 부유하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정렬되기 시작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나는 누군가?
통념상 외부세계가 먼저 존재하고 우리가 그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자아 밖에 외부세계가 실존하는지는 의심할만한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유신론자의 세계와 무신론자의 세계 중 실제 세계를 더 정확히 서술하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확고한 유신론자이거나 무신론자라면 어떤 것이라고 분명하게 답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세계는 언제나 자아의 세계다. 나는 내가 해석한 세계에 갇혀 산다. 이러한 자아의 주관적 세계를 지평이라 한다. 만약 외부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실체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 눈앞에 드러나는 세계는 내 뇌에 의해 재구성된, 왜곡된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의 실체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기관과 뇌가 그려주는 세계의 그림자를 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자폐아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를 맺어나갈 때 중요한 포인트다. 나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는 나의 세계의 진실성을 반영할 뿐이다. 그것은 타자의 세계를 재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고, 세계 전체를 기술하는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것이다. 지평의 충돌, 즉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까운 것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나의 지평 안으로 상대의 세계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상대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해안이 잠식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분노한다.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자신이 보는 세계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그들의 앞에서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 하나의 확고한 자신만의 진리관을 가진 이에게는 그 세계 밖의 것들에 대해 말할 때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상의 무수히 많은 곳에서 그러한 분노들을 목격할 수 있다. 자신이 오랜 시간동안 배운 경험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신입에게 분노하는 상관을 보았고, 자신이 공부한 학문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친구를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학생을 보았으며, 신의 나라를 외치며 불신하는 이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는 종교인을 보았고, 지지자와 반대자를 선과 악으로 양분하려는 정치인을 보았다. 한 사람에게 너무나 확고한 하나의 진리가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전이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았던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애초부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를 꺼리며 타인의 세계를 그대로 가져온다. 사람들이 믿는 것을 믿는 것,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심적 위안을 준다. 괜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며, 또한 수없이 검증되었을 것이다. 종교와 전통, 관습과 윤리, 국가와 사회도 마찬가지다. 먹고사는 데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각박한 세상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회적 담론 속에 자생적으로 자라난 비합리성이 들어 있다. 그래서 의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믿고 있다 하더라도, 너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크기가 너무나 압도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관조자다.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상식적인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나라는 것은 기억, 정체성, 연속성의 느낌, 무의식 등의 정신적인 무언가라고 한다. 하지만 간단하게 예를 들어, 기억도 다르고 정체성도 다르며 연속성도 없고 정신적인 부분도 다른 꿈 속의 누군가를 우리는 나라고 확신한다. 나라는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도대체 현실의 나와 꿈속의 내가 공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보고 있다는 그 상태. 현실의 나는 팔십억 명의 인구 중에서 하필 지금의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고 있고, 꿈속의 나는 꿈속에서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 중에서 하필이면 그 중 한 명의 시점으로 꿈속 세계를 보고 있다. 바로 그 시점, 그 관점, 보고 있음, 펼쳐진 세계의 중심점. 그것이 나와 꿈속의 내가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분모다. 이러한 특성으로서의 본질적 존재를 관조자라고 부른다. 지켜보는 존재. 이것이 자아의 본질이고, 존재하는 유일한 실체다.
그렇다면 세계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세계의 선후 관계를 상정하고 마음을 놓는다. 세계는 개별적 개체들보다 앞서 있다. 이것이 통념이고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정말로 나보다 세계가 앞서 있는가? 나 이전에도 세계가 있고, 나 이후에도 세계가 지속되는 것인가?
여기서 세계는 빛이라고 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태어날때부터 시각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은 주로 청각과 촉각으로 세상을 본다. 그들은 상상만으로 그 어떤 것도 그릴 수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빛이 아니다. 저자는 스스로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본다라는 것의 정의를 넓혀 세상과의 상호작용에 접목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설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랬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이 그린 세상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무엇이 아니다. 내면의 특성이다. 그렇다면 내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조자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세계는 나 자신이다.
내 앞에 펼쳐진 세계가 곧 나 자신이라는 것.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서구철학은 이를 현상이라 부르고, 고대 인도에서는 이를 마야라고 부르며, 불교에서는 이를 색이라고 말한다.
자기만의 색으로 지평을 넓히며 자신의 세계를 가꾸어나가는 사람은 고독하다. 이들은 고독 속에서 자기 안으로 침잠해가며 두려움을 느낀다. 깊은 사유와 기도와 명상과 침묵 안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자들. 아무것도 있을 리 없는 그곳에서 그는 도대체 무엇과 대면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죽음일 수밖에 없다. 죽음은 수동적인 사건으로, 또는 능동적인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는 죽음을 회피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의 태도를 가진 이의 시야 안으로 끝이 들어오면, 그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마지막 힘을 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드디어 정성스럽게 매듭지음으로써 인생 전체의 의미를 확정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그는 결국 죽음을 불러낸다. 시간을 뛰어넘어 세계의 끝에 있는 미래의 나, 늙고 초라하며 최후의 순간을 눈앞에 둔 자기 자신을.
그는 묻는다. 말하라. 최후의 나여. 나의 모든 인생을 경험했고, 그래서 이제 충분히 지혜로워진 입으로 대답하라.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리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래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마음에 들었던 내용이다.
실패라는 막다른 길에 봉착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가장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대답은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운이 좋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선택으로 시작하지 못할 것임을. 따라서 다른 길과 다른 가능성을 마음에 품은 채 느슨하게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아끼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걸어오는 동안 발견한 풍경들을 감상하며 실패에 도달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지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 있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신중히 걷는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라, 언제나 노력하고 나태해지지 말라고 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그것밖에는 없는 빈곤하고 겁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은 자신이 목표로 삼은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흔한 것은 이들이다. 한 가지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한 가지 목표에 모든 것을 거는 행위다. 이들이 한 가지에 몰두하는 이유는 이들이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반대로 이들이 나약해서다. 현실에서의 경험이 부족하고 세계의 복잡함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이들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무언가 분명해 보이는 것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단순한 전략을 세운다. 그래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전쟁에서 한 가지 전략으로 대응하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