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단순히 AI가 모든 것을 대체할 것이므로 그냥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정답인가? 하지만 이 주장은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다. 먼저, AI가 모든 것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제부터 확실하지 않다. 이것은 확신이 아니라 예측의 영역이고, 언제나 이러한 류의 예측은 크든 작든 빗나가기 일쑤였다. 다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라도 하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라는 것이다. 아마 저런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노력에 따른 보상이 비대칭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노력에 따라 보상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고 그것이 정의로워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럴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AI가 나오기 전부터 그러하였고, 결국 우리는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로 눈을 돌려야 한다. 무언가를 하면서 얻은 판단력, 학습하는 습관, 형성된 관계들은 노력에 따른 과정의 결과로서 남는다. 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애초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보상이 노력에 따라 비대칭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비대칭적이지 않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한 일이 AI에 의해 대체되더라도, 이에 허탈함을 느끼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무조건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문직도 몇 년 내로 모두 대체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와중에 큰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는 전문직을 그래도 하는 것이 정답인가.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행복을 챙기는 것이 정답인가.
먼저, 나는 행복이 인생의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잠깐이다. 인생의 과정을 윤택하게 만들어줄지언정, 목적지는 절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도달하는 순간 신기루처럼 증발해버리는 것은 목적지가 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인생에는 목적지도 없다는 게 나의 주된 생각이다. 물론 짧게 일주일, 한 달, 일 년 정도의 기간으로 보자면 목적지가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결국 인생 전체를 내려다보면 해당 목적지 또한 다른 목적지의 과정이고, 그 목적지 또한 다른 목적지의 과정이 되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꿈을 설계하고 노력하여 실제로 자신의 꿈을 실현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그 꿈이 인생의 목적지였다는 주장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먼저, 그 사람의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목적지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한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꿈을 설계하고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꿈이 실현된 것도 아니다.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꿈을 가지기 이전부터 쌓여온 과정들이 있고, 지금의 현실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것조차 이상적인 꿈이 아니라 그것에 가장 가까운 현실일 뿐이다.
또한 전문직을 해야 한다느니,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느니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결국 조금이라도 AI에 대한 해자를 구축하고 안정적인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두고 싶은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다른 말로는 지대를 형성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전문직은 물질적, 사회적 해자를 구축해줄 것이라 기대되고,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AI에게 밀려나든 말든 큰 영향을 받지 않아 정신적인 해자를 구축해줄 것이라 기대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게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언젠가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직종들은 AI에게 밀려날 것이고, 정신적 해자도 그리 멀지 않아 AI 앞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창작의 영역에서 가장 먼저 사람들의 반발이 나온 이유다. 밥그릇 싸움에서 패배했다기 보다는 예술가, 창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 타격이 컸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얼마나 좋아하고 잘하더라도 AI가 만든 결과물 앞에서 자신의 것은 하찮게 보이고 무의미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워야 할 것은 목표나 꿈이 아닌 꾸준한 자신만의 신념과 의지라고 생각한다. '나를 거쳐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내가 나를 의심하지 않기'와 같이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들이야말로 어쩌면 나에게는 남들이 말하는 인생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초기의 질문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을 하기에 앞서 더 근본적인 질문부터 해결해야 할 듯하다.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 역시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사회에서 한 사람으로서 1인분을 할 수 있기까지 6~7년이 더 남아있다. 그 긴 시간 뒤에도 세상이 지금과 같을지, 완전히 뒤바뀌어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서 계속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그 끝에 내가 원하는 목표가 있을 것임을 확신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만큼 나의 신념과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일 뿐이다.
추가로 넣지 못한 이야기를 하자면, AI 시대에 아이의 교육에서 부모의 역할은 훨씬 커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부모가 아이를 직접 이끌고 다니는 양육 방식은 가장 위험하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만 시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취향과 자율성은 얼마나 다양한 환경과 경험에 노출되었는가,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가에 따라서 크게 좌우된다. 부모는 아이에게 노출되는 환경과 경험을 다양하게 설계해야 한다. 이는 아이의 선택지를 넓히는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부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바탕 위에서다. 그리고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의 구간은 거의 예외 없이 지루하고 괴롭다. 아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게 두면 아이는 초기 저항이 가장 낮은 활동만 하게 된다. 그리고 초기 저항이 가장 낮은 활동은 대체로 가장 쉽게 대체되는 활동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양육은 이끌지 않는 양육이고, 그 중에서도 부모가 별다른 것을 하지 않은 경우가 아니라 아주 많은 것을 보여준 뒤 고르게 한 경우이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전국 1500곳을 넘게 다니며 체험 학습 및 견학을 시켜준 사례가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