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수업을 들을 때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남아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때부터 나에게 희망은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무언가였기에,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희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사람들이 헛된 기대를 가지고 자원과 시간을 소비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고통을 겪게 하는 것.
마냥 새롭게만 보였던 그때와 달리, 나만의 작은 생각이 생겨난 지금에 와서 다시 돌아보니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며 살아갈 때 나라는 사람은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 결국 좌절을 겪더라도,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은 나를 지탱해주는 기둥이 되어 줄 것임을 의심하지 않고 또 다른 다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미래를 설계해나가는 것이다. 인생을 능동적으로 살아내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적당히 하고 적당히 살아가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그것을 부정한다.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존재를 신경쓴다. 의식을 가졌는지는 고통을 겪을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지능과 의식은 다르다. 지능이 발달해도 의식은 없을 수 있다. 예로 AI는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지능은 뛰어나다. 하지만 고통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아파하는 것, 개나 고양이가 힘들어하는 것, 곤충이 포식자에게 당하고 달아나는 것. 아메바가 특정 화학물질을 인식하고 반대로 도망가는 것. 어디까지가 고통의 경계인가? 다시 말해, 의식의 경계는 어디인가? 또 다시 말해, 의식은 실존하는 것인가, 우리의 허상일 뿐인가?
작금의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당연하게 여겨진다. 공동체에 헌신하여 개인의 소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부조리한 것이고, 각 개인이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한국이, 세계가 혼란스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