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가 끝났다.
생각보다 너무 어렵게 나왔다. 솔직히 별로 외우고 싶지 않은 생각에 대충 공부하기는 했지만, 작년에 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수업보다 확실히 어려웠다.
사회학이라는 과목이 나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일까? 배경지식이 다양하게 많았다면 학습하는 과정에서 암기의 양을 줄이고 주관적인 이해의 양이 늘어나 공부하기 훨씬 수월했을 것 같다.
이번에는 AI로 시험 준비를 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공부하는 내내 다양한 AI 툴로 공부를 했다. 구글의 제미나이와 Notebooklm, 엔트로픽의 클로드 등으로 퀴즈를 만들고 문제를 풀고 개념 이해를 위한 마인드맵도 만들어보면서 공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도움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직접 암기한 내용을 토대로 사람의 뇌를 통해서 유기적으로 내용을 연결하는 능력이 필요한 문제들이 대다수였다. 아직 AI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들을 적절하게 융합해서 하나의 문제로 만들어내는 능력은 처참한 수준이다. 문제를 만들어 달라고 해도 한 pdf 내에서 거의 붙어있는 개념들로만 문제를 만들어내고, 마인드맵이나 기타 여러 생성물 또한 좁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주가 되고, AI는 그 곁가지가 되어야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고난 뒤에 행복이 온다... 옛 말에는 틀린 말이 없는건지, 시험이 끝나자 하나 또 해냈다는 기분에 행복감을 느꼈다.
사회학의 이해라는 강의 자체로는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많았다. '오 이건 내가 생각하던 거랑 비슷한데?', '이게 뭔 소리지 전혀 아닌데?' 를 넘나들면서 수업을 듣다보니 강의 하나를 듣는데도 진이 다 빠졌다. 내가 얼마나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나를 느끼면서도, 굳이 그렇게까지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려 해야할까, 그것이 꼭 선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무제한의 자유가 좋은 것인가. 현명한 사람과 우둔한 사람, 올바른 사람과 나쁜 사람,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에게 똑같은 정치적 자유와 똑같은 부를 주려 하는게 맞는 것인가. 결국 이런 논제의 결말은 기반에 깔려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점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럼 불평등 하나를 바로잡기 위해 뭘 어디까지 영역을 넓히고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예를 들어, 지금도 물과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잉여 자원들을 그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가? 결국 선택의 영역이지,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다. 불평등은 바로잡을 수 없다. 그 정도를 어느정도 완화하는, 손익분기점과 같은 정도에서 그쳐야지 그 이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또한 불평등 자체가 꼭 악인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불평등하기에, 그 자리를 염원하고,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성장하려는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보석처럼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에 무너지고 구조 개혁만을 외칠때 그들은 묵묵히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가 만들어낸 불가해한 불평등에 맞서 성장한다.
이 외에도 수업을 들으면서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 이론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되어간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아를 만드는 게 아니라,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상징적 상호작용론자들은 인간이 인간적 특성을 획득하는 것은 오로지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이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은 지식, 스타일, 취향, 신체적 표현, 말투, 몸가짐, 표정 등을 기반으로 한 총체적 자산을 말한다. 어떤 문화적 자본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회적 경제적 자본의 획득 정도가 달라진다.
Dramatrugy는 인상관리로, 표현적 책임을 들 수 있다.(ex.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모두 연기자(We are all fakers)라는 것이다.
지대는 원래 토지로부터 나오는 수익을 일컫는 말이었다. 지금은 점차 의미의 외연이 확장되어 지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독점권, 배타적 독점 이윤, 독점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면허제, 허가제, 규제 등이 있다. 그렇다면 의사 면허도 지대
간주관성은 공통으로 이해될 수 있는 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타인의 행위 동기를 어느 정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간주관성 덕분이다. 주관적 이해가 객관적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 법정에서 재판도 상당부분 간주관성에 의존한다.
기말고사가 끝났다.
생각보다 너무 어렵게 나왔다. 솔직히 별로 외우고 싶지 않은 생각에 대충 공부하기는 했지만, 작년에 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수업보다 확실히 어려웠다.
사회학이라는 과목이 나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일까? 배경지식이 다양하게 많았다면 학습하는 과정에서 암기의 양을 줄이고 주관적인 이해의 양이 늘어나 공부하기 훨씬 수월했을 것 같다.
이번에는 AI로 시험 준비를 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공부하는 내내 다양한 AI 툴로 공부를 했다. 구글의 제미나이와 Notebooklm, 엔트로픽의 클로드 등으로 퀴즈를 만들고 문제를 풀고 개념 이해를 위한 마인드맵도 만들어보면서 공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도움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직접 암기한 내용을 토대로 사람의 뇌를 통해서 유기적으로 내용을 연결하는 능력이 필요한 문제들이 대다수였다. 아직 AI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들을 적절하게 융합해서 하나의 문제로 만들어내는 능력은 처참한 수준이다. 문제를 만들어 달라고 해도 한 pdf 내에서 거의 붙어있는 개념들로만 문제를 만들어내고, 마인드맵이나 기타 여러 생성물 또한 좁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주가 되고, AI는 그 곁가지가 되어야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고난 뒤에 행복이 온다... 옛 말에는 틀린 말이 없는건지, 시험이 끝나자 하나 또 해냈다는 기분에 행복감을 느꼈다.
사회학의 이해라는 강의 자체로는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많았다. '오 이건 내가 생각하던 거랑 비슷한데?', '이게 뭔 소리지 전혀 아닌데?' 를 넘나들면서 수업을 듣다보니 강의 하나를 듣는데도 진이 다 빠졌다. 내가 얼마나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나를 느끼면서도, 굳이 그렇게까지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려 해야할까, 그것이 꼭 선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무제한의 자유가 좋은 것인가. 현명한 사람과 우둔한 사람, 올바른 사람과 나쁜 사람,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에게 똑같은 정치적 자유와 똑같은 부를 주려 하는게 맞는 것인가. 결국 이런 논제의 결말은 기반에 깔려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점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럼 불평등 하나를 바로잡기 위해 뭘 어디까지 영역을 넓히고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예를 들어, 지금도 물과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잉여 자원들을 그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가? 결국 선택의 영역이지,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다. 불평등은 바로잡을 수 없다. 그 정도를 어느정도 완화하는, 손익분기점과 같은 정도에서 그쳐야지 그 이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또한 불평등 자체가 꼭 악인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불평등하기에, 그 자리를 염원하고,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성장하려는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보석처럼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에 무너지고 구조 개혁만을 외칠때 그들은 묵묵히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가 만들어낸 불가해한 불평등에 맞서 성장한다.
이 외에도 수업을 들으면서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 이론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되어간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아를 만드는 게 아니라,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상징적 상호작용론자들은 인간이 인간적 특성을 획득하는 것은 오로지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이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은 지식, 스타일, 취향, 신체적 표현, 말투, 몸가짐, 표정 등을 기반으로 한 총체적 자산을 말한다. 어떤 문화적 자본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회적 경제적 자본의 획득 정도가 달라진다.
Dramatrugy는 인상관리로, 표현적 책임을 들 수 있다.(ex.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모두 연기자(We are all fakers)라는 것이다.
지대는 원래 토지로부터 나오는 수익을 일컫는 말이었다. 지금은 점차 의미의 외연이 확장되어 지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독점권, 배타적 독점 이윤, 독점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면허제, 허가제, 규제 등이 있다. 그렇다면 의사 면허도 지대
간주관성은 공통으로 이해될 수 있는 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타인의 행위 동기를 어느 정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간주관성 덕분이다. 주관적 이해가 객관적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 법정에서 재판도 상당부분 간주관성에 의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