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itasium-파인만 경로적분과 최소 작용의 원리에 관한 영상 /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박권 지음]
우리는, 이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최근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론 중 하나인 하향식 우주론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에 큰 흥미가 생겨 이해를 해보고자 하였지만 수박 겉핥기 식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래는 내가 며칠 동안 이해하려 발버둥 치면서 알게 된 내용들이다. 솔직히 내가 이해하고 서술한 내용들이 맞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미묘한 차이로 보였던 것들이 알고보면 완전히 다른 설명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
하향식 우주론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개념들이 있다.
[플랑크 상수]
플랑크 상수는 전구의 효율성을 테스트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산업적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조명이 더 효율적인지, 투입한 에너지 대비 가시광선을 얼마나 방출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독일 제국 물리기술연구소(PTR)에서 뜨거운 물체가 내는 복사(열복사)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연구자들은 문제를 이상화하기 위해 흑체(black body)를 정의했다. 흑체란 자기 자신에게 오는 모든 전자기파를 완전히 흡수하는 이상적인 물체로, 이 물체가 내놓는 복사는 재질과 무관하게 오직 온도로만 결정된다. 실험적으로 이론적 흑체에 가까운 물체를 만들기 위해 내부를 검게 칠한 공동에 작은 구멍을 뚫은 박스를 사용하였다. 구멍으로 들어간 빛은 내부에서 반사를 거듭하며 결국 다 흡수되므로, 구멍 자체가 거의 완벽한 흑체처럼 행동한다. (박스가 흑체가 아니라 구멍이 흑체인 것에 주의해야 한다. 구멍으로 들어간 빛은 안에서 거의 다 흡수되어 밖으로 나올 확률이 0에 수렴한다. 반대로 그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복사가 해당 온도의 흑체복사다. 박스는 구멍이 이상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어주는 장치일 뿐이다.)
흑체(구멍)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측정하여 스펙트럼을 도출하였는데, 이는 두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1) 온도가 오르면 방출되는 총 에너지는 급격하게 증가한다(그래프 아래 면적). 2) 스펙트럼의 봉우리(가장 강하게 방출되는 파장)는 온도가 오를수록 짧은 파장 쪽으로 이동한다(빈의 변위법칙). 쇠를 달구면 처음에는 붉게, 더 달구면 주황, 노랑을 거쳐 백색으로 빛나는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계속해서 달구다 보면 모든 가시광선 스펙트럼 영역에서 강하게 방출되는 때에 백색으로 보인다.)
문제는 당시의 고전물리학으로 이 스펙트럼 곡선을 유도하려 할 때 발생했다. 공동 내부의 전자기파는 기타 줄처럼 정상파 모드(정상파에서 발생하는 반파장 단위)들로 나눌 수 있고, 열평형 상태에서는 통계역학의 에너지 등분배 정리에 따라 각 모드가 평균적으로 kT만큼의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이때 파장이 짧아질수록 공동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정상파 모드의 개수는 한없이 많아지고, 이 모든 모드가 똑같이 kT씩 받는다면 짧은 파장 영역에서 방출 에너지가 점점 무한대로 발산해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다. 실험적(실제) 스펙트럼은 짧은 파장에서 오히려 0으로 떨어지므로, 당시의 고전물리학에는 오류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등분배 정리란, 온도 T의 열평형계에서는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자유도 하나하나가 평균 (1/2)kT씩을 가진다(k는 볼츠만 상수)는 이론이다. 공동 속 전자기파의 각 정상파 모드도 하나의 진동 자유도이므로 평균 kT(전기장 자유도 + 자기장 자유도)씩 받아야 한다. 한편 단위 부피당 모드 수는 파장의 네제곱에 반비례해 증가하므로(상자 안에 들어가는 파동의 전체 개수 N을 구한다. N∝λ^(-3)
파장이 아주 조금 변할 때(d\λ), 파동의 개수가 얼마나 추가되는지(dN) 그 변화량을 구한다. dN∝λ^(-4)), 모드당 기여는 일정한데 모드의 수가 발산하는 구조가 자외선 파탄의 본질이다.)
플랑크는 공동의 벽(박스 내부 벽)을 이루는 수많은 미시적인 진동자들이 전자기파와 에너지를 주고받는 상황을 모형화했다. 여기서 그는 볼츠만의 통계 기법(에너지를 유한한 크기의 조각으로 잘라 배분하는 경우의 수를 세는 방법)을 차용했다. 원래 그는 이 기법의 계산 마지막에 조각의 크기를 0으로 보내는 극한을 취해 연속적인 에너지의 형태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외선 파탄이 재현되었고, 조각의 크기를 진동수에 비례하는 유한한 값 E=hf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이것 또한 고전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선 아이디어인데, 고전물리학에서 파동의 에너지는 오직 진폭에 의해서만 에너지가 변동된다고 생각했다. 진동수는 에너지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해당 수식을 실제 스펙트럼 그래프와 맞아떨어지게 하는 상수 h값이 바로 플랑크 상수(6.626×10^{-34}J•s)다. 에너지의 양자화가 파탄을 막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진동수가 높은 모드일수록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최소 단위 E=hf가 커지는데, 온도 T의 열적 환경이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 규모는 kT 수준이다. hf가 kT보다 훨씬 큰 고주파 모드는 첫 에너지조차 받지 못해 자유도의 동결(Freeze-out)이 발생하고, 그 결과 스펙트럼이 짧은 파장 쪽에서 0으로 떨어진다. 무한히 많은 고주파 모드가 있어도, 그 대부분이 에너지를 아예 받지 못하므로 총합은 유한하게 된다.
여기서 개념의 구분이 하나 필요하다. 플랑크가 양자화한 것은 벽의 진동자가 에너지를 주고받는 방식이지, 빛 또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다. 플랑크 본인은 양자화에 대해 수학적 편법으로 여겼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빛의 입자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얽힘(Entanglement)]
두 입자가 얽혀 있다는 것은 두 입자의 상태가 하나의 파동함수로 묶여 있어 한쪽을 측정하면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른 쪽의 상태가 즉시 결정된다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이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라 부르며 불편해했던 현상이다. 하지만 얽힘을 이용해도 빛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쪽의 측정 결과는 무작위이기 때문에(관찰자가 결과를 조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과값이 나오기 전까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동전 던지기와 같다) 상대방과 결과를 비교하려면 고전적 통신이 필요하다(정보를 전송하려면 의도가 들어가야 한다. 모스 부호처럼 의도적으로 결과값을 배열해야 정보를 가진 메시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측정 결과를 통제할 수 없으니 애초에 의도적으로 결과값 배열 자체가 불가능하고 정보를 담을 수 없다. 따라서 얽혀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한쪽의 데이터를 다른 쪽으로 고전적 방식으로 전송하여 서로 정확히 반대로 짝이 맞춰져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양자 결어긋남(decoherence)]
간섭은 진폭이 상쇄·보강되는 현상이다. 양자역학에서 어떤 결과가 일어날 확률은 진폭이라는 값에서 나온다. 진폭은 확률이 아니라, 확률의 전 단계에 있는 값이다. 진폭에서 실제 확률을 얻으려면 그 크기를 제곱해야 한다. 이 제곱 단계가 둘을 구분 짓는 핵심으로, 진폭은 부호(위상)를 가질 수 있는 반면(+0.5일 수도 0.5일 수도 있다) 제곱하는 순간 그 부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0.5)²와 (−0.5)²는 똑같이 0.25다). 간섭이란 바로 이 부호가 살아있는 진폭들이 제곱되기 전에 서로 만나 더해지는 현상이다. 두 진폭이 같은 부호면 커지고(밝은 무늬) 반대 부호면 상쇄된다(어두운 무늬). 부호가 죽기 전에 만나야만 상쇄가 가능하다.
이때, 아무 진폭이나 더해지는 게 아니다. 두 경로의 최종 상태가 같으면 진폭을 먼저 더하고, 그 합을 제곱한다. 부호가 살아있는 채로 만나므로 상쇄·보강이 일어난다(간섭이 있다). 두 경로의 최종 상태가 다르면 각 진폭을 먼저 제곱해 확률로 만들고, 그 확률들을 더한다. 제곱하면서 부호가 죽으므로 상쇄가 불가능하다(간섭이 없다).
확률이란 결국 그 결과가 실현될 확률이다. 서로 다른 최종 결과는 애초에 배타적인 별개의 사건이라 확률이 그냥 더해질 뿐 겹칠 수 없다. 반면 하나의 동일한 결과에 여러 방법으로 도달할 때만 그 방법들이 하나의 결과에 대한 여러 기여이므로 진폭 수준에서 합쳐진다. 숫자로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두 경로의 진폭이 +0.5와 −0.5일 때 최종 상태가 같으면 먼저 더해서 0이 되고 제곱해도 확률은 0이다. 최종 상태가 다르면 각각 제곱해 (0.25 + 0.25 = 0.5) 상쇄가 사라진다. 같은 진폭인데도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결어긋남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양자계는 완벽히 고립될 수 없어 주변의 공기 분자, 광자, 열복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이 상호작용에서 벌어지는 일은 환경의 상태가 계의 경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전자가 이중슬릿을 지나 스크린의 한 점 P에 도달하는 경우를 보자.
환경이 개입하지 않았을 때
왼쪽 슬릿을 지난 경우의 최종 상태 = 전자가 P에 있음
오른쪽 슬릿을 지난 경우의 최종 상태 = 전자가 P에 있음
이 둘은 동일한 최종 상태다. 그래서 진폭이 더해지고 간섭무늬가 생긴다.
이제 전자가 왼쪽을 지날 때 근처 공기 분자가 A방향으로 튕기고, 오른쪽을 지날 때 B방향으로 튕긴다고 할 때
왼쪽을 지난 경우 =전자가 P에 있음 + 분자가 A방향
오른쪽을 지난 경우 = 전자가 P에 있음 + 분자가 B방향
전자의 위치는 P로 같지만, 우주 전체의 상태는 분자 부분에서 갈라져 서로 다른 최종 상태가 된다. 규칙에 따라 진폭이 아니라 확률이 더해지고, 간섭무늬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결어긋남이다.
결국 누군가 그 공기 분자를 실제로 관찰해 A인지 B인지 알아낼 필요가 전혀 없다. 분자의 상태가 경로에 따라 달라졌다는 사실, 즉 원리적으로 구별 가능한 차이가 어딘가에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최종 상태는 이미 갈라졌고 간섭은 불가능해진다.
이를 보여주는 실제 실험이 있다. 큰 분자(플러렌 같은 것)로 이중슬릿 간섭을 시킬 때, 분자의 온도를 높이면 간섭무늬가 점점 흐려진다. 뜨거운 분자는 열복사 광자를 방출하는데, 그 광자의 파장이 두 슬릿 간격보다 짧아지면 광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에 대한 구별 가능한 정보를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광자를 일부러 관측하지 않아도 방출되었다는 것만으로 무늬가 사라지고, 반대로 분자를 차갑게 유지하면 간섭이 돌아온다.
거시 물체에서는 이 과정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물체가 클수록 부딪히는 공기 분자와 광자가 많고, 그 각각이 물체의 위치 정보를 실어 날라 최종 상태를 갈라놓는다. 먼지 한 톨 크기 물체의 위치 중첩조차 대략 10⁻³¹초 수준에서 결어긋남이 발생한다. 그래서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고양이 같은 거시적 중첩을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환경이 즉각 최종 상태를 갈라놓아 간섭 가능성을 없애기 때문이다.
결어긋남은 왜 간섭이 사라지고 왜 세계가 고전적으로 보이는지는 정확히 설명한다. 하지만 여러 갈라진 가능성 중 왜 단 하나의 결과만 실제로 실현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결어긋남이 말해주는 것은 왼쪽 결과와 오른쪽 결과가 더 이상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고, 그중 오른쪽이 실제로 일어남 은 어떻게 정해지는가는 다세계 해석, 코펜하겐 해석 등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어 미해결 지점으로 남는다.
[확률진폭(complex amplitude)과 이중슬릿 실험]
양자역학에서 진폭은 확률진폭(complex amplitude)을 말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역사(가능성) 하나하나에 존재하는 복소수(진폭)을 전부 더한다. 진폭들은 복소수라 위상이 있어서 더할 때 서로 보강되거나 상쇄된다. 위상이라 함은 복소수 좌표계에서 한 화살표(양자시계(Quantum watch)라고도 한다)의 길이(원점에서의 거리)와 방향(각도) 중 방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3+2i는 길이가 약 3.6이고 방향이 약 35도쯤 되는 화살표가 있다면 위상은 35도이다. 두 화살표를 더할 때, 화살표가 비슷한 방향으로 뻗어있으면 최종 화살표가 길어진다(발생 확률이 커진다). 따라서 역사가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역사라는 것이 파동처럼 출렁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각 역사(가능성)마다 복소진폭이 붙고, 그것들이 간섭한다는 뜻이다.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것도 물질 자체가 파동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자가 위치할 확률들의 결과를 보니 파동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뜻이다.
우주의 모든 입자가 확률적인 파동이라는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으로부터 나온다.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로 인해 파동인 줄 알았던 빛이 입자성까지 동시에 가진다는 사실이 널리 퍼지자, 학자들은 역으로 입자인 줄 알았던 것들도 파동의 성질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루이 드브로이는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로, 운동량 p로 움직이는 모든 물질은 파장 λ=h/p의 (확률)파동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드브로이의 가설은 현실의 실험적 결과를 증명하는데 위력적이었다. 닐스 보어의 원자모형에서는 수소 원자에서 전자가 특정 궤도들만 돌 수 있다고 가정해 수소 스펙트럼을 설명했지만, 이러한 가정은 관측 결과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었다(고전 전자기학에 따르면 궤도를 도는 전자는 에너지를 복사하며 핵으로 나선 추락해야 했지만(라모어 공식에 따르면 전하를 띠는 입자가 가속운동(원운동 또한 가속운동의 일종이다)하면 전자기파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된다. 라디오 등 안테나의 원리이기도 하다) 원자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수소 스펙트럼 또한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한 선(Rydberg 공식)으로 나온다). 하지만 드브로이의 가설에 따라 전자 또한 파동으로 본다면, 궤도 둘레를 따라 파장이 정수 개로 딱 맞아떨어져 제 꼬리를 제가 무는 정상파를 형성하는 궤도만이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둘레 = n\λ 조건은 보어의 각운동량 양자화 조건(mvr=nℏ)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후 데이비슨-거머 실험 등에서 전자가 결정 격자에 의해 회절하는 현상이 실제로 관측되며 물질 또한 파동(물질파)이라는 것은 실험적 사실이 되었다.
또한 물질의 파동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중슬릿 실험이다. 파동을 두 개의 슬릿에 통과시키면 두 슬릿에서 퍼져 나온 파동이 겹치며 보강 또는 상쇄 간섭이 일어나 스크린에 밝고 어두운 줄무늬(간섭무늬)가 생긴다. 빛으로 해도 똑같이 간섭무늬가 나타나 빛의 파동성을 보여준다(영의 실험).
이번엔 전자를 이중슬릿에 쏘아 보자. 전자를 한 번에 하나씩, 서로 영향을 줄 수 없게 시간 간격을 두고 쏘아도 스크린에는 전자 점들의 분포가 정확히 간섭무늬를 이룬다. 전자 한 개가 마치 두 슬릿을 동시에 지나가면서 자기 자신과 간섭을 일으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각 전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 측정 장치로 확인하면 간섭무늬는 사라지고 직관적 예상에 따르는 두 줄 분포만 남는다. 즉, 관측(측정)을 하는 순간 두 파동이 더는 간섭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하인츠-디터 제, 보이치에흐 주렉, 에리히 주스 등이 발전시킨 양자 결어긋남(decoherence) 이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바로 위에서 설명한 개념).
[최소작용 원리와 파인만의 경로 적분]
파인만은 대학에서 이중슬릿 관련 강의를 듣던 중 중첩된 파동의 세기는 각 파동의 진폭을 먼저 더한 후 제곱한 값이 최종 파동의 세기가 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슬릿의 개수를 무한히 늘렸을 때도 똑같이 진폭을 다 더한 것의 제곱을 하면 된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는 양자역학적 확률 밀도에도 적용되는데, 슬릿이 무한하다는 뜻은 슬릿 왼쪽 지점인 A에서 슬릿 오른쪽 너머 지점인 B로 가는 가능한 모든 경로의 진폭을 다 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입자가 발견될 확률은 가능한 모든 경로(태양을 찍고 돌아오는 경로, 은하 중심을 다녀오는 경로 등)의 확률 진폭을 모두 합한 뒤 제곱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해당 입자가 그 모든 경로를 탐색하고 온다는 뜻이 아니다. 그 가능한 모든 경로들 중 가장 있을법한 경로가 우리 눈에 보인 것이다. 모든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 눈에 그 결과가 보이게 되면 해당 역사가 선별되는 사후 선별과 의미를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사후 선별은 바로 다음 개념 설명에서 다루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경로의 확률 진폭을 합하는 것을 파인만의 경로 적분이라 한다. 경로 적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물리와 대비해보아야 한다. 야구공을 던지면 정확히 하나의 포물선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방법이 원리적으로는 무한히 많은데(직선, 지그재그, 달 찍고 오기 등) 실제로는 딱 하나의 궤적만 선택되어 관측된다. 고전물리는 이를 최소작용의 원리(principle of least action)라고 한다. 각 가능한 경로마다 작용(action)이라는 숫자를 하나 부여할 수 있는데, 자연이 선택하는 경로는 이 작용의 값을 최소로 만드는 경로이다. (대략적으로 덧붙이자면 작용이란 그 경로를 따라가는 동안 쌓이는 운동에너지-위치에너지의 시간 합이다. S = integral(t1-t2)(T-V) dt) 파인만은 여기에 질문을 던졌다. 만약 자연이 하나만 고르는 게 아니라면, 만약 광자가 A에서 B로 갈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다 지나가는 거라면? 이 모든 경로를 동시에 지나가면서 각 경로가 도착 지점에 기여하는 걸 합산한 결과로 최종 확률이 정해지는 것 아닐까?
각 경로 하나하나에 화살표를 부여한다. 이 화살표의 방향(위상)은 그 경로의 작용에 의해 정해진다. 작용이 크면 화살표가 많이 돌아가고 작으면 덜 돌아간다. (위상 화살표를 돌리는 기준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입자가 궤적을 따라 이동하며 겪은 에너지와 시간의 총합) 그리고 A에서 B에 도착할 확률진폭은 모든 경로의 화살표를 다 더한 결과다. 최종 화살표 길이를 제곱하면 실제로 A에서 B로 갈 확률이 나온다. 수많은 경로의 화살표를 다 더하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경로는 서로 상쇄된다. 위상은 경로의 작용 S를 ℏ로 나눈 값이다. 직관적으로는, 각 경로마다 작은 시계 바늘이 하나씩 있어 경로를 따라가는 동안 S/ℏ에 비례해 회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최소작용 경로 근처에서는 경로가 조금 바뀌어도 작용이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이웃 경로들의 화살표가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고 서로 보강해서 최종 화살표를 만든다(이때 근방의 경로 다발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완전한 단일 경로가 아니라는 뜻으로, 실제로 이것에 의해 양자 요동, 양자 터널링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최소작용 경로에서 먼 경로(이상한 경로들)는 그것과 조금만 다른 경로라 하더라도 작용이 매우 크게 달라져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렇게 인접한 경로들끼리 화살표 방향은 가히 랜덤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빠르게 회전하여 다 더하면 거의 대부분 상쇄되어 버린다. 공은 크고 무거워서 작용의 크기가 매우 크다. 조금만 최소작용 경로를 벗어나도 위상이 마구 돌아버리고, 최소작용 근처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전자 수준에서는 작용 S의 값이 ℏ수준으로 작다. 따라서 상쇄가 불완전하고 넓은 범위의 경로가 살아남아 이중슬릿 간섭이 그대로 나타난다. 빛의 직진, 반사, 페르마의 최소 시간 원리(어떻게 빛이나 공이 출발하기도 전에 어떻게 모든 경로를 비교해서 최적 경로를 아는 건지는 수백 년간 논쟁거리였다.)도 모두 같은 논리다.
지금까지의 얘기만 들어보면 빛 등이 모든 경로를 지나간다고 가정한 후 논리를 진행한 것 같다. 그러나 입자(알갱이)는 안 갔을지 몰라도, 그 입자가 존재할 확률 파동은 분명히 거울의 가장자리까지 실제로 퍼져나가 훑고 지나갔다. 이것을 증명하는 실험이 실제로 있다. 레이저를 거울에 비스듬히 쏘면, 입사각과 반사각이 같아지는 정반사 지점을 경유한 빛만 눈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반사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거울 가장자리 부분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레이저 빛은 보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는 그 부분으로 빛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로적분의 해석은 다르다. 거울 가장자리를 경유해 눈으로 오는 경로들도 전부 진폭을 기여하고 있다. 다만 그 영역에서는 인접한 경로들끼리 위상이 빠르게 달라져 위상이 전 방향을 고르게 가리키며 짝지어 상쇄될 뿐이다. 즉, 빛이 안 가는 것이 아니라 경로들이 서로를 지우는 것이다. 결국 상쇄가 일어나는 이유가 반대 위상의 경로 짝이라면, 그 짝 중 절반을 물리적으로 제거했을 때 상쇄가 풀리고 빛이 나타나야 한다. 실제로 정반사 지점에서 벗어난 거울 영역에 위상이 반대가 되는 경로들이 경유하는 거울 상의 위치만 골라 가리도록 간격을 계산한 회절격자(검은 줄무늬)를 덮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던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선명한 반사광이 보인다. 이는 해당 경로들도 무언가가 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물리학이 실제로 보증하는 것은 모든 경로에 대해 합산하는 계산이 관측 결과를 정확히 따른다는 것이지, 그 너머의 무언가를 확언하지는 않는다.
[지연 선택(delayed choice)실험과 사후 선별(post-selection), 관계론적 양자역학]
존 아치볼드 휠러는 이중슬릿 실험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질문을 한다. 광자가 슬릿을 이미 통과한 후에, 경로를 측정할지 말지를 결정하면 어떻게 될까? 광자는 슬릿을 지나는 시점에 파동으로 통과할지 입자로 통과할지 미리 정해야 할 텐데, 우리가 측정 여부를 나중에 바꾸면 광자는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선택을 수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지연선택 사고실험은 1999년 김윤호 연구팀의 지연선택 양자 지우개 실험으로 정교하게 구현되었다.(역사(가능성)은 원래 중첩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준 실험)
실험의 구성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아르곤 이온 레이저 빔이 이중 슬릿을 통과한 직후, BBO라는 특수한 비선형 광학 결정에 부딪힌다(비선형 광학 결정이란 단순히 빛이 통과, 굴절, 반사하는 것을 넘어 빛 자체가 쪼개지거나 다른 파장으로 변환되는 특수한 결정을 말한다. 이 실험에서는 BBO의 비선형성 덕분에 광자 1개가 결정 내부에서 더 낮은 에너지(긴 파장)을 가진 얽힌 광자 2개로 쪼개진다). 이 결정은 자발적 매개 하향 변환(SPDC)이라는 과정을 통해 광자 하나를 서로 얽힌 광자 한 쌍으로 쪼갠다. 쌍둥이 중 하나인 signal 광자는 곧장 검출기 D0로 날아가 위치가 기록되고, 다른 하나인 idler 광자는 반투과 거울(빛을 절반 확률로 반사하거나 통과시키는 거울)들이 복잡하게 배치된 미로 같은 경로를 지나 네 개의 검출기 D1~D4 중 하나에 도달한다. 미로의 설계가 절묘한데, 아이들러 광자가 D3나 D4에 도달하면 원래 광자가 어느 슬릿에서 왔는지를 알 수 있고(경로 정보 획득, 예를 들어 D3는 왼쪽 슬릿, D4는 오른쪽 슬릿), D1이나 D2에 도달하면 두 슬릿의 경로가 거울에서 뒤섞여(마지막 beam splitter(BS, 절반 확률로 반투과하는 거울)에서 절반은 투과되고 절반은 반사된다. 따라서 어떤 광자가 검출되었을 때 그 광자는 위 입구로 들어와 투과된 것인지 아니면 아래 입구로 들어와 반사된 것인지를 알 수 없고, 위 입구로 들어와 반사된 것인지 아래 입구로 들어와 투과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슬릿에서 왔는지를 알 수 없어진다(경로 정보 지움).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들러 광자의 경로는 신호 광자의 경로보다 약 2.5미터 더 길다. 즉, 신호 광자는 자신의 쌍둥이가 어떤 검출기로 갈지(경로 정보 획득인지, 경로 정보 지움인지) 결정되기 약 8나노초 전에 이미 스크린에 도달하여 위치를 기록해 버린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아이들러 광자가 경로 정보를 지운 검출기(D1, D2)에 도달한 사건들만 골라서, 그 얽힌 신호 광자들이 D0에 남긴 위치를 모아 보면 선명한 간섭 무늬가 나타난다. 반대로 경로 정보가 확정된 검출기(D3, D4)와 얽힌 신호 광자들만 모으면 간섭 무늬가 없는 입자성을 가진 분포가 나온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나중에 일어난 아이들러 광자의 측정이 이미 스크린에 도달해버린 신호 광자의 과거 행동(파동이었는지 입자였는지)를 결정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역인과율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답은 D0에 기록된 전체 데이터에 있다. 아이들러 쪽 결과와 짝을 짓지 않고 D0에 쌓인 신호 광자들의 전체적인 위치 분포를 보면 간섭 무늬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무늬 없는 입자성을 가진 패턴만 보인다. 수학적으로 보자면 얽힌 쌍의 한쪽만 따로 떼어 본 신호 광자의 상태(축소 밀도 행렬)는 최대로 뒤섞인 혼합 상태여서 어떤 간섭도 보여줄 수 없다...라는데 잘 모르겠고, 이미 signal 광자와 idler 광자는 얽혀 있어 idler라는 관측자에 의해 signal은 이미 관측당한 상태, 즉 결어긋남(decoherence)이 발생한 상태다. 즉 과거에 스크린에 새겨진 물리적 기록 자체는 미래의 어떤 선택에 의해서도 단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간섭 무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연구자들이 아이들러 광자의 측정 결과라는 별도의 정보(앞서 말했던 고전적 통신으로 얻은 데이터)를 이용해 D0의 전체 데이터에서 특정 부분집합만 골라냈을 때 비로소 간섭 무늬가 드러난다.(기존 이중슬릿 실험에서 간섭무늬가 바로 보이던 것과의 차이: 단일 광자는 매번 일정한 초기 위상을 가지므로 스크린의 동일한 위치에 간섭 무늬가 누적된다. 반면 얽힘 상태로 쪼개진 광자 쌍은 전체 위상의 합만 보존될 뿐 개별 광자의 위상은 매번 무작위로 결정되므로, 위치가 어긋난 간섭 무늬들이 누적되면서 전체적으로 간섭 효과가 상쇄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후 선별(post-selection)이라고 부른다. 비유하자면, 무작위로 찍힌 점들의 거대한 그림에서 빨간 점들만 뽑아봤더니 숨어 있던 그림이 나타난 것과 같다. 그림 전체는 처음부터 그대로였고, 우리가 나중에 어떤 기준으로 점들을 분류했느냐가 달라졌을 뿐이다(그림자 아트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예시로 들기에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D1과 짝지은 무늬와 D2와 짝지은 무늬는 정확히 반대 위상으로 어긋나 있어서(1. 반투과 거울에서 반사는 위상을 pi만큼 뒤집고 투과는 위상을 그대로 유지한다. 2. 모든 signal 광자의 idler는 결국 D1~4중 하나로 반드시 간다. 이때 D3와 D4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 슬릿 하나만 열어놓은 것과 같은 단일 덩어리다. 따라서 이 둘을 합치면 이미 D0와 같은 두 뭉텅이 형태의 간섭 없는 분포가 나온다. 그렇다면 남은 D1과 D2부분이 합쳐졌을 때도 두 뭉텅이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데 D1은 간섭무늬를 띠어 밝은 줄과 어두운 줄이 번갈아 있다. 이걸 D2와 합쳐서 간섭이 없는 결과가 되려면 D2의 밝은 줄이 정확히 D1의 어두운 줄 위치에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둘은 pi만큼 어긋난 반대 위상이다.), 둘을 합치면 무늬가 상쇄되어 사라진다. 전체 데이터에 무늬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이 실험은 과거를 바꾸는 실험이 아니다. 파동이나 입자냐 하는 성질은 광자 하나가 단독으로 지니는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얽힌 시스템 전체에서 어떤 정보를 추출하기로 했느냐에 따라 정의되는 관계적(relational) 속성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의 실재는 입자 하나하나의 성질이 아니라 정보와 상관관계의 그물망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론적 양자역학의 대표자로 카를로 로벨리가 있다. 그는 절대적인 물리적 상태는 없고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작용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해석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사고실험이 바로 위그너의 친구(Wigner's friend)다. 관찰자 A는 실험실 안에 있는 위그너의 친구다. A가 닫힌 방 안에서 동전을 던져 결과를 확인했을 때 앞면이 나왔다. A에게 동전의 양자 중첩은 깨졌고, 동전은 앞면이라는 확정된 실재를 가진다. 관찰자 B는 실험실 밖의 위그너다. B는 아직 실험실에 들어가지 않았고 A에게 결과를 듣지도 못했다. B의 입장에서 실험실 안의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 겹쳐있는 중첩된 상태다. 기존 양자역학에서는 누구의 상태가 물리적 진실인가를 두고 큰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로벨리의 관계론적 양자역학에서는 둘 다 맞다는 결론이 난다. 즉, 절대적인 시점은 존재하지 않고 실재는 오직 관찰자를 기준으로만 상태가 정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찰자가 꼭 의식을 가진 인간이나 측정 장비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전자 두 개가 서로 부딪히는 순간, 두 전자는 서로에게 관찰자가 된다. 상호작용하는 그 찰나에 두 전자는 서로에 대한 위치와 운동 정보를 주고받고,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일시적으로 확정된 실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스티븐 호킹의 하향식 우주론에 대해 아주아주 대략적으로 알아보자.
하향식 우주론이란, 우주가 하나의 확정된 역사(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가능한 역사들의 중첩으로 존재한다면, 기준은 명확한 모습을 가진 현재(현재 관측되는 우주의 모습)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를 기준으로, 현재의 조건들을 성립하는 데 부합하는 과거의 역사를 하향식으로 경로적분으로 역산해나가자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상향식 접근은 씨앗을 심고 어떤 나무가 자랄지 예측하는 것이고, 하향식 접근은 눈앞의 나무에서 시작해서 이 나무로 자라날 수 있었던 모든 과거 상태들의 확률을 통해 과거를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즉, 우리 우주는 3차원 공간을 가지고 관측자가 존재할 수 있는 물리 상수를 가진다 = 현재의 모습이 확률의 필터와 같이 작용하여 이 필터를 통과할 수 있는 역사들(현재의 조건과 양립하는 역사들)만이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관측이 과거를 물리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역인과율이 아니라는 뜻), 확정되지 않은 과거들의 중첩 상태에서 현재와 정합되는 부분집합(역사)이 선별되는 사후 선별이다.
파인만의 경로 적분을 우주 전체로 확장해 보자. 광자가 A에서 B로 갈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궤적을 거치듯, 우주 역시 초기 상태(빅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상 가능한 모든 시공간의 형태와 팽창 역사를 확률진폭으로서 거쳐왔다. 고전적 우주론(상향식 우주론)은 우주가 단 하나의 결정론적 궤적을 따라 진화했다고 믿었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여러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듯 우주 또한 무수히 많은 가능한 역사를 겪은 상태로 중첩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기존의 상향식(bottom-up) 우주론이 마주했던 심각한 딜레마, 미세조정 문제(fine-tuning problem)가 해결된다. 중력의 세기, 전자의 질량, 우주 팽창 속도 등 물리 상수들이 지금보다 아주 조금만 달랐어도 별이 형성되지 않거나 원자가 붕괴하여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상향식 우주론에서는 빅뱅 순간의 초기 조건이 로또를 연속으로 맞추는 수준의 기적적인 확률로 정밀하게 세팅되어 지금의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향식 우주론에서는 초기 조건이 특별할 필요가 없다. 빅뱅 직후에는 생명체가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물리 법칙을 가진 수많은 우주의 역사들도 파인만의 이상한 경로들처럼 진폭의 형태로 중첩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관측자(우리)가 우주를 관측하고 있다는 현재의 확정된 사실이 사후 선별의 기준점이 된다. 거울의 엉뚱한 위치를 거치는 빛의 경로들이 반대 위상과 만나 상쇄되듯, 현재의 우주적 조건과 양립할 수 없는 궤적(역사)들은 소거된다. 오직 지금의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조건의 역사들만이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아 서로 보강 간섭을 일으키고, 지금 우리가 보는 최종 화살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지연 선택 양자 지우개 실험을 우주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출기에서 얻어낸 아이들러 광자의 경로 정보 유무(현재의 조건)를 기준으로 D0의 밋밋한 전체 데이터 속에서 숨어있던 간섭 무늬(특정 역사)를 사후 선별해 낸 것과 완전히 동일한 논리다. 138억 년 전 우주가 어떤 경로로 진화할지 그 당시부터 미리 단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138억 년이 지난 지금 생명체라는 관찰자가 우주와 상호작용하는 그 순간의 조건들이 수많은 과거의 중첩 중 특정한 부분집합을 뽑아내어 지금의 우주를 구성한다. 우리가 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행위 자체가 중첩되어 있던 수많은 가능성의 과거 중 하나를 현재와 얽히게 만들어 확정된 실재로 끌어내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관계론적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주라는 거대한 시스템 역시 절대적이고 독립된 역사적 궤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호작용하는 두 전자가 서로에게 관찰자가 되어 실재를 확정 짓듯, 거시적 관찰자인 우리와 우주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찰나에 그물망 같은 관계 안에서 상대적인 실재를 이룬다. 양자 결어긋남을 통해 끊임없이 우주의 상태가 갈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명확한 최종 상태(결과)가 주어졌기에 그 수많은 갈래의 가능성들은 우리가 속한 단 하나의 물리적 역사로 정렬될 수 있다. 스티븐 호킹의 하향식 우주론은 우리가 거대한 우주에 던져진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양자역학적인 사후 선별을 통해 138억 년 전 빅뱅부터 시작된 가능성들의 중첩 속에서 지금의 우주 역사를 결정지은 가장 결정적인 '참여자'임을 시사한다(참여론적 우주론(Participatory Anthropic Principle)-존 아치볼드 휠러가 제안한 해석).
[Veritasium-파인만 경로적분과 최소 작용의 원리에 관한 영상 /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박권 지음]
우리는, 이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최근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론 중 하나인 하향식 우주론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에 큰 흥미가 생겨 이해를 해보고자 하였지만 수박 겉핥기 식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래는 내가 며칠 동안 이해하려 발버둥 치면서 알게 된 내용들이다. 솔직히 내가 이해하고 서술한 내용들이 맞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미묘한 차이로 보였던 것들이 알고보면 완전히 다른 설명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
하향식 우주론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개념들이 있다.
[플랑크 상수]
플랑크 상수는 전구의 효율성을 테스트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산업적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조명이 더 효율적인지, 투입한 에너지 대비 가시광선을 얼마나 방출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독일 제국 물리기술연구소(PTR)에서 뜨거운 물체가 내는 복사(열복사)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연구자들은 문제를 이상화하기 위해 흑체(black body)를 정의했다. 흑체란 자기 자신에게 오는 모든 전자기파를 완전히 흡수하는 이상적인 물체로, 이 물체가 내놓는 복사는 재질과 무관하게 오직 온도로만 결정된다. 실험적으로 이론적 흑체에 가까운 물체를 만들기 위해 내부를 검게 칠한 공동에 작은 구멍을 뚫은 박스를 사용하였다. 구멍으로 들어간 빛은 내부에서 반사를 거듭하며 결국 다 흡수되므로, 구멍 자체가 거의 완벽한 흑체처럼 행동한다. (박스가 흑체가 아니라 구멍이 흑체인 것에 주의해야 한다. 구멍으로 들어간 빛은 안에서 거의 다 흡수되어 밖으로 나올 확률이 0에 수렴한다. 반대로 그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복사가 해당 온도의 흑체복사다. 박스는 구멍이 이상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어주는 장치일 뿐이다.)
흑체(구멍)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측정하여 스펙트럼을 도출하였는데, 이는 두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1) 온도가 오르면 방출되는 총 에너지는 급격하게 증가한다(그래프 아래 면적). 2) 스펙트럼의 봉우리(가장 강하게 방출되는 파장)는 온도가 오를수록 짧은 파장 쪽으로 이동한다(빈의 변위법칙). 쇠를 달구면 처음에는 붉게, 더 달구면 주황, 노랑을 거쳐 백색으로 빛나는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계속해서 달구다 보면 모든 가시광선 스펙트럼 영역에서 강하게 방출되는 때에 백색으로 보인다.)
문제는 당시의 고전물리학으로 이 스펙트럼 곡선을 유도하려 할 때 발생했다. 공동 내부의 전자기파는 기타 줄처럼 정상파 모드(정상파에서 발생하는 반파장 단위)들로 나눌 수 있고, 열평형 상태에서는 통계역학의 에너지 등분배 정리에 따라 각 모드가 평균적으로 kT만큼의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이때 파장이 짧아질수록 공동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정상파 모드의 개수는 한없이 많아지고, 이 모든 모드가 똑같이 kT씩 받는다면 짧은 파장 영역에서 방출 에너지가 점점 무한대로 발산해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다. 실험적(실제) 스펙트럼은 짧은 파장에서 오히려 0으로 떨어지므로, 당시의 고전물리학에는 오류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등분배 정리란, 온도 T의 열평형계에서는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자유도 하나하나가 평균 (1/2)kT씩을 가진다(k는 볼츠만 상수)는 이론이다. 공동 속 전자기파의 각 정상파 모드도 하나의 진동 자유도이므로 평균 kT(전기장 자유도 + 자기장 자유도)씩 받아야 한다. 한편 단위 부피당 모드 수는 파장의 네제곱에 반비례해 증가하므로(상자 안에 들어가는 파동의 전체 개수 N을 구한다. N∝λ^(-3)
파장이 아주 조금 변할 때(d\λ), 파동의 개수가 얼마나 추가되는지(dN) 그 변화량을 구한다. dN∝λ^(-4)), 모드당 기여는 일정한데 모드의 수가 발산하는 구조가 자외선 파탄의 본질이다.)
플랑크는 공동의 벽(박스 내부 벽)을 이루는 수많은 미시적인 진동자들이 전자기파와 에너지를 주고받는 상황을 모형화했다. 여기서 그는 볼츠만의 통계 기법(에너지를 유한한 크기의 조각으로 잘라 배분하는 경우의 수를 세는 방법)을 차용했다. 원래 그는 이 기법의 계산 마지막에 조각의 크기를 0으로 보내는 극한을 취해 연속적인 에너지의 형태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외선 파탄이 재현되었고, 조각의 크기를 진동수에 비례하는 유한한 값 E=hf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이것 또한 고전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선 아이디어인데, 고전물리학에서 파동의 에너지는 오직 진폭에 의해서만 에너지가 변동된다고 생각했다. 진동수는 에너지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해당 수식을 실제 스펙트럼 그래프와 맞아떨어지게 하는 상수 h값이 바로 플랑크 상수(6.626×10^{-34}J•s)다. 에너지의 양자화가 파탄을 막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진동수가 높은 모드일수록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최소 단위 E=hf가 커지는데, 온도 T의 열적 환경이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 규모는 kT 수준이다. hf가 kT보다 훨씬 큰 고주파 모드는 첫 에너지조차 받지 못해 자유도의 동결(Freeze-out)이 발생하고, 그 결과 스펙트럼이 짧은 파장 쪽에서 0으로 떨어진다. 무한히 많은 고주파 모드가 있어도, 그 대부분이 에너지를 아예 받지 못하므로 총합은 유한하게 된다.
여기서 개념의 구분이 하나 필요하다. 플랑크가 양자화한 것은 벽의 진동자가 에너지를 주고받는 방식이지, 빛 또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다. 플랑크 본인은 양자화에 대해 수학적 편법으로 여겼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빛의 입자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얽힘(Entanglement)]
두 입자가 얽혀 있다는 것은 두 입자의 상태가 하나의 파동함수로 묶여 있어 한쪽을 측정하면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른 쪽의 상태가 즉시 결정된다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이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라 부르며 불편해했던 현상이다. 하지만 얽힘을 이용해도 빛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쪽의 측정 결과는 무작위이기 때문에(관찰자가 결과를 조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과값이 나오기 전까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동전 던지기와 같다) 상대방과 결과를 비교하려면 고전적 통신이 필요하다(정보를 전송하려면 의도가 들어가야 한다. 모스 부호처럼 의도적으로 결과값을 배열해야 정보를 가진 메시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측정 결과를 통제할 수 없으니 애초에 의도적으로 결과값 배열 자체가 불가능하고 정보를 담을 수 없다. 따라서 얽혀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한쪽의 데이터를 다른 쪽으로 고전적 방식으로 전송하여 서로 정확히 반대로 짝이 맞춰져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양자 결어긋남(decoherence)]
간섭은 진폭이 상쇄·보강되는 현상이다. 양자역학에서 어떤 결과가 일어날 확률은 진폭이라는 값에서 나온다. 진폭은 확률이 아니라, 확률의 전 단계에 있는 값이다. 진폭에서 실제 확률을 얻으려면 그 크기를 제곱해야 한다. 이 제곱 단계가 둘을 구분 짓는 핵심으로, 진폭은 부호(위상)를 가질 수 있는 반면(+0.5일 수도 0.5일 수도 있다) 제곱하는 순간 그 부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0.5)²와 (−0.5)²는 똑같이 0.25다). 간섭이란 바로 이 부호가 살아있는 진폭들이 제곱되기 전에 서로 만나 더해지는 현상이다. 두 진폭이 같은 부호면 커지고(밝은 무늬) 반대 부호면 상쇄된다(어두운 무늬). 부호가 죽기 전에 만나야만 상쇄가 가능하다.
이때, 아무 진폭이나 더해지는 게 아니다. 두 경로의 최종 상태가 같으면 진폭을 먼저 더하고, 그 합을 제곱한다. 부호가 살아있는 채로 만나므로 상쇄·보강이 일어난다(간섭이 있다). 두 경로의 최종 상태가 다르면 각 진폭을 먼저 제곱해 확률로 만들고, 그 확률들을 더한다. 제곱하면서 부호가 죽으므로 상쇄가 불가능하다(간섭이 없다).
확률이란 결국 그 결과가 실현될 확률이다. 서로 다른 최종 결과는 애초에 배타적인 별개의 사건이라 확률이 그냥 더해질 뿐 겹칠 수 없다. 반면 하나의 동일한 결과에 여러 방법으로 도달할 때만 그 방법들이 하나의 결과에 대한 여러 기여이므로 진폭 수준에서 합쳐진다. 숫자로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두 경로의 진폭이 +0.5와 −0.5일 때 최종 상태가 같으면 먼저 더해서 0이 되고 제곱해도 확률은 0이다. 최종 상태가 다르면 각각 제곱해 (0.25 + 0.25 = 0.5) 상쇄가 사라진다. 같은 진폭인데도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결어긋남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양자계는 완벽히 고립될 수 없어 주변의 공기 분자, 광자, 열복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이 상호작용에서 벌어지는 일은 환경의 상태가 계의 경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전자가 이중슬릿을 지나 스크린의 한 점 P에 도달하는 경우를 보자.
환경이 개입하지 않았을 때
왼쪽 슬릿을 지난 경우의 최종 상태 = 전자가 P에 있음
오른쪽 슬릿을 지난 경우의 최종 상태 = 전자가 P에 있음
이 둘은 동일한 최종 상태다. 그래서 진폭이 더해지고 간섭무늬가 생긴다.
이제 전자가 왼쪽을 지날 때 근처 공기 분자가 A방향으로 튕기고, 오른쪽을 지날 때 B방향으로 튕긴다고 할 때
왼쪽을 지난 경우 =전자가 P에 있음 + 분자가 A방향
오른쪽을 지난 경우 = 전자가 P에 있음 + 분자가 B방향
전자의 위치는 P로 같지만, 우주 전체의 상태는 분자 부분에서 갈라져 서로 다른 최종 상태가 된다. 규칙에 따라 진폭이 아니라 확률이 더해지고, 간섭무늬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결어긋남이다.
결국 누군가 그 공기 분자를 실제로 관찰해 A인지 B인지 알아낼 필요가 전혀 없다. 분자의 상태가 경로에 따라 달라졌다는 사실, 즉 원리적으로 구별 가능한 차이가 어딘가에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최종 상태는 이미 갈라졌고 간섭은 불가능해진다.
이를 보여주는 실제 실험이 있다. 큰 분자(플러렌 같은 것)로 이중슬릿 간섭을 시킬 때, 분자의 온도를 높이면 간섭무늬가 점점 흐려진다. 뜨거운 분자는 열복사 광자를 방출하는데, 그 광자의 파장이 두 슬릿 간격보다 짧아지면 광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에 대한 구별 가능한 정보를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광자를 일부러 관측하지 않아도 방출되었다는 것만으로 무늬가 사라지고, 반대로 분자를 차갑게 유지하면 간섭이 돌아온다.
거시 물체에서는 이 과정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물체가 클수록 부딪히는 공기 분자와 광자가 많고, 그 각각이 물체의 위치 정보를 실어 날라 최종 상태를 갈라놓는다. 먼지 한 톨 크기 물체의 위치 중첩조차 대략 10⁻³¹초 수준에서 결어긋남이 발생한다. 그래서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고양이 같은 거시적 중첩을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환경이 즉각 최종 상태를 갈라놓아 간섭 가능성을 없애기 때문이다.
결어긋남은 왜 간섭이 사라지고 왜 세계가 고전적으로 보이는지는 정확히 설명한다. 하지만 여러 갈라진 가능성 중 왜 단 하나의 결과만 실제로 실현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결어긋남이 말해주는 것은 왼쪽 결과와 오른쪽 결과가 더 이상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고, 그중 오른쪽이 실제로 일어남 은 어떻게 정해지는가는 다세계 해석, 코펜하겐 해석 등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어 미해결 지점으로 남는다.
[확률진폭(complex amplitude)과 이중슬릿 실험]
양자역학에서 진폭은 확률진폭(complex amplitude)을 말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역사(가능성) 하나하나에 존재하는 복소수(진폭)을 전부 더한다. 진폭들은 복소수라 위상이 있어서 더할 때 서로 보강되거나 상쇄된다. 위상이라 함은 복소수 좌표계에서 한 화살표(양자시계(Quantum watch)라고도 한다)의 길이(원점에서의 거리)와 방향(각도) 중 방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3+2i는 길이가 약 3.6이고 방향이 약 35도쯤 되는 화살표가 있다면 위상은 35도이다. 두 화살표를 더할 때, 화살표가 비슷한 방향으로 뻗어있으면 최종 화살표가 길어진다(발생 확률이 커진다). 따라서 역사가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역사라는 것이 파동처럼 출렁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각 역사(가능성)마다 복소진폭이 붙고, 그것들이 간섭한다는 뜻이다.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것도 물질 자체가 파동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자가 위치할 확률들의 결과를 보니 파동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뜻이다.
우주의 모든 입자가 확률적인 파동이라는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으로부터 나온다.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로 인해 파동인 줄 알았던 빛이 입자성까지 동시에 가진다는 사실이 널리 퍼지자, 학자들은 역으로 입자인 줄 알았던 것들도 파동의 성질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루이 드브로이는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로, 운동량 p로 움직이는 모든 물질은 파장 λ=h/p의 (확률)파동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드브로이의 가설은 현실의 실험적 결과를 증명하는데 위력적이었다. 닐스 보어의 원자모형에서는 수소 원자에서 전자가 특정 궤도들만 돌 수 있다고 가정해 수소 스펙트럼을 설명했지만, 이러한 가정은 관측 결과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었다(고전 전자기학에 따르면 궤도를 도는 전자는 에너지를 복사하며 핵으로 나선 추락해야 했지만(라모어 공식에 따르면 전하를 띠는 입자가 가속운동(원운동 또한 가속운동의 일종이다)하면 전자기파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된다. 라디오 등 안테나의 원리이기도 하다) 원자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수소 스펙트럼 또한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한 선(Rydberg 공식)으로 나온다). 하지만 드브로이의 가설에 따라 전자 또한 파동으로 본다면, 궤도 둘레를 따라 파장이 정수 개로 딱 맞아떨어져 제 꼬리를 제가 무는 정상파를 형성하는 궤도만이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둘레 = n\λ 조건은 보어의 각운동량 양자화 조건(mvr=nℏ)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후 데이비슨-거머 실험 등에서 전자가 결정 격자에 의해 회절하는 현상이 실제로 관측되며 물질 또한 파동(물질파)이라는 것은 실험적 사실이 되었다.
또한 물질의 파동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중슬릿 실험이다. 파동을 두 개의 슬릿에 통과시키면 두 슬릿에서 퍼져 나온 파동이 겹치며 보강 또는 상쇄 간섭이 일어나 스크린에 밝고 어두운 줄무늬(간섭무늬)가 생긴다. 빛으로 해도 똑같이 간섭무늬가 나타나 빛의 파동성을 보여준다(영의 실험).
이번엔 전자를 이중슬릿에 쏘아 보자. 전자를 한 번에 하나씩, 서로 영향을 줄 수 없게 시간 간격을 두고 쏘아도 스크린에는 전자 점들의 분포가 정확히 간섭무늬를 이룬다. 전자 한 개가 마치 두 슬릿을 동시에 지나가면서 자기 자신과 간섭을 일으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각 전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 측정 장치로 확인하면 간섭무늬는 사라지고 직관적 예상에 따르는 두 줄 분포만 남는다. 즉, 관측(측정)을 하는 순간 두 파동이 더는 간섭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하인츠-디터 제, 보이치에흐 주렉, 에리히 주스 등이 발전시킨 양자 결어긋남(decoherence) 이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바로 위에서 설명한 개념).
[최소작용 원리와 파인만의 경로 적분]
파인만은 대학에서 이중슬릿 관련 강의를 듣던 중 중첩된 파동의 세기는 각 파동의 진폭을 먼저 더한 후 제곱한 값이 최종 파동의 세기가 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슬릿의 개수를 무한히 늘렸을 때도 똑같이 진폭을 다 더한 것의 제곱을 하면 된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는 양자역학적 확률 밀도에도 적용되는데, 슬릿이 무한하다는 뜻은 슬릿 왼쪽 지점인 A에서 슬릿 오른쪽 너머 지점인 B로 가는 가능한 모든 경로의 진폭을 다 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입자가 발견될 확률은 가능한 모든 경로(태양을 찍고 돌아오는 경로, 은하 중심을 다녀오는 경로 등)의 확률 진폭을 모두 합한 뒤 제곱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해당 입자가 그 모든 경로를 탐색하고 온다는 뜻이 아니다. 그 가능한 모든 경로들 중 가장 있을법한 경로가 우리 눈에 보인 것이다. 모든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 눈에 그 결과가 보이게 되면 해당 역사가 선별되는 사후 선별과 의미를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사후 선별은 바로 다음 개념 설명에서 다루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경로의 확률 진폭을 합하는 것을 파인만의 경로 적분이라 한다. 경로 적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물리와 대비해보아야 한다. 야구공을 던지면 정확히 하나의 포물선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방법이 원리적으로는 무한히 많은데(직선, 지그재그, 달 찍고 오기 등) 실제로는 딱 하나의 궤적만 선택되어 관측된다. 고전물리는 이를 최소작용의 원리(principle of least action)라고 한다. 각 가능한 경로마다 작용(action)이라는 숫자를 하나 부여할 수 있는데, 자연이 선택하는 경로는 이 작용의 값을 최소로 만드는 경로이다. (대략적으로 덧붙이자면 작용이란 그 경로를 따라가는 동안 쌓이는 운동에너지-위치에너지의 시간 합이다. S = integral(t1-t2)(T-V) dt) 파인만은 여기에 질문을 던졌다. 만약 자연이 하나만 고르는 게 아니라면, 만약 광자가 A에서 B로 갈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다 지나가는 거라면? 이 모든 경로를 동시에 지나가면서 각 경로가 도착 지점에 기여하는 걸 합산한 결과로 최종 확률이 정해지는 것 아닐까?
각 경로 하나하나에 화살표를 부여한다. 이 화살표의 방향(위상)은 그 경로의 작용에 의해 정해진다. 작용이 크면 화살표가 많이 돌아가고 작으면 덜 돌아간다. (위상 화살표를 돌리는 기준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입자가 궤적을 따라 이동하며 겪은 에너지와 시간의 총합) 그리고 A에서 B에 도착할 확률진폭은 모든 경로의 화살표를 다 더한 결과다. 최종 화살표 길이를 제곱하면 실제로 A에서 B로 갈 확률이 나온다. 수많은 경로의 화살표를 다 더하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경로는 서로 상쇄된다. 위상은 경로의 작용 S를 ℏ로 나눈 값이다. 직관적으로는, 각 경로마다 작은 시계 바늘이 하나씩 있어 경로를 따라가는 동안 S/ℏ에 비례해 회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최소작용 경로 근처에서는 경로가 조금 바뀌어도 작용이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이웃 경로들의 화살표가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고 서로 보강해서 최종 화살표를 만든다(이때 근방의 경로 다발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완전한 단일 경로가 아니라는 뜻으로, 실제로 이것에 의해 양자 요동, 양자 터널링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최소작용 경로에서 먼 경로(이상한 경로들)는 그것과 조금만 다른 경로라 하더라도 작용이 매우 크게 달라져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렇게 인접한 경로들끼리 화살표 방향은 가히 랜덤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빠르게 회전하여 다 더하면 거의 대부분 상쇄되어 버린다. 공은 크고 무거워서 작용의 크기가 매우 크다. 조금만 최소작용 경로를 벗어나도 위상이 마구 돌아버리고, 최소작용 근처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전자 수준에서는 작용 S의 값이 ℏ수준으로 작다. 따라서 상쇄가 불완전하고 넓은 범위의 경로가 살아남아 이중슬릿 간섭이 그대로 나타난다. 빛의 직진, 반사, 페르마의 최소 시간 원리(어떻게 빛이나 공이 출발하기도 전에 어떻게 모든 경로를 비교해서 최적 경로를 아는 건지는 수백 년간 논쟁거리였다.)도 모두 같은 논리다.
지금까지의 얘기만 들어보면 빛 등이 모든 경로를 지나간다고 가정한 후 논리를 진행한 것 같다. 그러나 입자(알갱이)는 안 갔을지 몰라도, 그 입자가 존재할 확률 파동은 분명히 거울의 가장자리까지 실제로 퍼져나가 훑고 지나갔다. 이것을 증명하는 실험이 실제로 있다. 레이저를 거울에 비스듬히 쏘면, 입사각과 반사각이 같아지는 정반사 지점을 경유한 빛만 눈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반사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거울 가장자리 부분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레이저 빛은 보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는 그 부분으로 빛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로적분의 해석은 다르다. 거울 가장자리를 경유해 눈으로 오는 경로들도 전부 진폭을 기여하고 있다. 다만 그 영역에서는 인접한 경로들끼리 위상이 빠르게 달라져 위상이 전 방향을 고르게 가리키며 짝지어 상쇄될 뿐이다. 즉, 빛이 안 가는 것이 아니라 경로들이 서로를 지우는 것이다. 결국 상쇄가 일어나는 이유가 반대 위상의 경로 짝이라면, 그 짝 중 절반을 물리적으로 제거했을 때 상쇄가 풀리고 빛이 나타나야 한다. 실제로 정반사 지점에서 벗어난 거울 영역에 위상이 반대가 되는 경로들이 경유하는 거울 상의 위치만 골라 가리도록 간격을 계산한 회절격자(검은 줄무늬)를 덮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던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선명한 반사광이 보인다. 이는 해당 경로들도 무언가가 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물리학이 실제로 보증하는 것은 모든 경로에 대해 합산하는 계산이 관측 결과를 정확히 따른다는 것이지, 그 너머의 무언가를 확언하지는 않는다.
[지연 선택(delayed choice)실험과 사후 선별(post-selection), 관계론적 양자역학]
존 아치볼드 휠러는 이중슬릿 실험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질문을 한다. 광자가 슬릿을 이미 통과한 후에, 경로를 측정할지 말지를 결정하면 어떻게 될까? 광자는 슬릿을 지나는 시점에 파동으로 통과할지 입자로 통과할지 미리 정해야 할 텐데, 우리가 측정 여부를 나중에 바꾸면 광자는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선택을 수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지연선택 사고실험은 1999년 김윤호 연구팀의 지연선택 양자 지우개 실험으로 정교하게 구현되었다.(역사(가능성)은 원래 중첩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준 실험)
실험의 구성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아르곤 이온 레이저 빔이 이중 슬릿을 통과한 직후, BBO라는 특수한 비선형 광학 결정에 부딪힌다(비선형 광학 결정이란 단순히 빛이 통과, 굴절, 반사하는 것을 넘어 빛 자체가 쪼개지거나 다른 파장으로 변환되는 특수한 결정을 말한다. 이 실험에서는 BBO의 비선형성 덕분에 광자 1개가 결정 내부에서 더 낮은 에너지(긴 파장)을 가진 얽힌 광자 2개로 쪼개진다). 이 결정은 자발적 매개 하향 변환(SPDC)이라는 과정을 통해 광자 하나를 서로 얽힌 광자 한 쌍으로 쪼갠다. 쌍둥이 중 하나인 signal 광자는 곧장 검출기 D0로 날아가 위치가 기록되고, 다른 하나인 idler 광자는 반투과 거울(빛을 절반 확률로 반사하거나 통과시키는 거울)들이 복잡하게 배치된 미로 같은 경로를 지나 네 개의 검출기 D1~D4 중 하나에 도달한다. 미로의 설계가 절묘한데, 아이들러 광자가 D3나 D4에 도달하면 원래 광자가 어느 슬릿에서 왔는지를 알 수 있고(경로 정보 획득, 예를 들어 D3는 왼쪽 슬릿, D4는 오른쪽 슬릿), D1이나 D2에 도달하면 두 슬릿의 경로가 거울에서 뒤섞여(마지막 beam splitter(BS, 절반 확률로 반투과하는 거울)에서 절반은 투과되고 절반은 반사된다. 따라서 어떤 광자가 검출되었을 때 그 광자는 위 입구로 들어와 투과된 것인지 아니면 아래 입구로 들어와 반사된 것인지를 알 수 없고, 위 입구로 들어와 반사된 것인지 아래 입구로 들어와 투과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슬릿에서 왔는지를 알 수 없어진다(경로 정보 지움).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들러 광자의 경로는 신호 광자의 경로보다 약 2.5미터 더 길다. 즉, 신호 광자는 자신의 쌍둥이가 어떤 검출기로 갈지(경로 정보 획득인지, 경로 정보 지움인지) 결정되기 약 8나노초 전에 이미 스크린에 도달하여 위치를 기록해 버린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아이들러 광자가 경로 정보를 지운 검출기(D1, D2)에 도달한 사건들만 골라서, 그 얽힌 신호 광자들이 D0에 남긴 위치를 모아 보면 선명한 간섭 무늬가 나타난다. 반대로 경로 정보가 확정된 검출기(D3, D4)와 얽힌 신호 광자들만 모으면 간섭 무늬가 없는 입자성을 가진 분포가 나온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나중에 일어난 아이들러 광자의 측정이 이미 스크린에 도달해버린 신호 광자의 과거 행동(파동이었는지 입자였는지)를 결정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역인과율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답은 D0에 기록된 전체 데이터에 있다. 아이들러 쪽 결과와 짝을 짓지 않고 D0에 쌓인 신호 광자들의 전체적인 위치 분포를 보면 간섭 무늬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무늬 없는 입자성을 가진 패턴만 보인다. 수학적으로 보자면 얽힌 쌍의 한쪽만 따로 떼어 본 신호 광자의 상태(축소 밀도 행렬)는 최대로 뒤섞인 혼합 상태여서 어떤 간섭도 보여줄 수 없다...라는데 잘 모르겠고, 이미 signal 광자와 idler 광자는 얽혀 있어 idler라는 관측자에 의해 signal은 이미 관측당한 상태, 즉 결어긋남(decoherence)이 발생한 상태다. 즉 과거에 스크린에 새겨진 물리적 기록 자체는 미래의 어떤 선택에 의해서도 단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간섭 무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연구자들이 아이들러 광자의 측정 결과라는 별도의 정보(앞서 말했던 고전적 통신으로 얻은 데이터)를 이용해 D0의 전체 데이터에서 특정 부분집합만 골라냈을 때 비로소 간섭 무늬가 드러난다.(기존 이중슬릿 실험에서 간섭무늬가 바로 보이던 것과의 차이: 단일 광자는 매번 일정한 초기 위상을 가지므로 스크린의 동일한 위치에 간섭 무늬가 누적된다. 반면 얽힘 상태로 쪼개진 광자 쌍은 전체 위상의 합만 보존될 뿐 개별 광자의 위상은 매번 무작위로 결정되므로, 위치가 어긋난 간섭 무늬들이 누적되면서 전체적으로 간섭 효과가 상쇄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후 선별(post-selection)이라고 부른다. 비유하자면, 무작위로 찍힌 점들의 거대한 그림에서 빨간 점들만 뽑아봤더니 숨어 있던 그림이 나타난 것과 같다. 그림 전체는 처음부터 그대로였고, 우리가 나중에 어떤 기준으로 점들을 분류했느냐가 달라졌을 뿐이다(그림자 아트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예시로 들기에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D1과 짝지은 무늬와 D2와 짝지은 무늬는 정확히 반대 위상으로 어긋나 있어서(1. 반투과 거울에서 반사는 위상을 pi만큼 뒤집고 투과는 위상을 그대로 유지한다. 2. 모든 signal 광자의 idler는 결국 D1~4중 하나로 반드시 간다. 이때 D3와 D4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 슬릿 하나만 열어놓은 것과 같은 단일 덩어리다. 따라서 이 둘을 합치면 이미 D0와 같은 두 뭉텅이 형태의 간섭 없는 분포가 나온다. 그렇다면 남은 D1과 D2부분이 합쳐졌을 때도 두 뭉텅이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데 D1은 간섭무늬를 띠어 밝은 줄과 어두운 줄이 번갈아 있다. 이걸 D2와 합쳐서 간섭이 없는 결과가 되려면 D2의 밝은 줄이 정확히 D1의 어두운 줄 위치에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둘은 pi만큼 어긋난 반대 위상이다.), 둘을 합치면 무늬가 상쇄되어 사라진다. 전체 데이터에 무늬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이 실험은 과거를 바꾸는 실험이 아니다. 파동이나 입자냐 하는 성질은 광자 하나가 단독으로 지니는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얽힌 시스템 전체에서 어떤 정보를 추출하기로 했느냐에 따라 정의되는 관계적(relational) 속성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의 실재는 입자 하나하나의 성질이 아니라 정보와 상관관계의 그물망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론적 양자역학의 대표자로 카를로 로벨리가 있다. 그는 절대적인 물리적 상태는 없고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작용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해석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사고실험이 바로 위그너의 친구(Wigner's friend)다. 관찰자 A는 실험실 안에 있는 위그너의 친구다. A가 닫힌 방 안에서 동전을 던져 결과를 확인했을 때 앞면이 나왔다. A에게 동전의 양자 중첩은 깨졌고, 동전은 앞면이라는 확정된 실재를 가진다. 관찰자 B는 실험실 밖의 위그너다. B는 아직 실험실에 들어가지 않았고 A에게 결과를 듣지도 못했다. B의 입장에서 실험실 안의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 겹쳐있는 중첩된 상태다. 기존 양자역학에서는 누구의 상태가 물리적 진실인가를 두고 큰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로벨리의 관계론적 양자역학에서는 둘 다 맞다는 결론이 난다. 즉, 절대적인 시점은 존재하지 않고 실재는 오직 관찰자를 기준으로만 상태가 정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찰자가 꼭 의식을 가진 인간이나 측정 장비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전자 두 개가 서로 부딪히는 순간, 두 전자는 서로에게 관찰자가 된다. 상호작용하는 그 찰나에 두 전자는 서로에 대한 위치와 운동 정보를 주고받고,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일시적으로 확정된 실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스티븐 호킹의 하향식 우주론에 대해 아주아주 대략적으로 알아보자.
하향식 우주론이란, 우주가 하나의 확정된 역사(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가능한 역사들의 중첩으로 존재한다면, 기준은 명확한 모습을 가진 현재(현재 관측되는 우주의 모습)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를 기준으로, 현재의 조건들을 성립하는 데 부합하는 과거의 역사를 하향식으로 경로적분으로 역산해나가자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상향식 접근은 씨앗을 심고 어떤 나무가 자랄지 예측하는 것이고, 하향식 접근은 눈앞의 나무에서 시작해서 이 나무로 자라날 수 있었던 모든 과거 상태들의 확률을 통해 과거를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즉, 우리 우주는 3차원 공간을 가지고 관측자가 존재할 수 있는 물리 상수를 가진다 = 현재의 모습이 확률의 필터와 같이 작용하여 이 필터를 통과할 수 있는 역사들(현재의 조건과 양립하는 역사들)만이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관측이 과거를 물리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역인과율이 아니라는 뜻), 확정되지 않은 과거들의 중첩 상태에서 현재와 정합되는 부분집합(역사)이 선별되는 사후 선별이다.
파인만의 경로 적분을 우주 전체로 확장해 보자. 광자가 A에서 B로 갈 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궤적을 거치듯, 우주 역시 초기 상태(빅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상 가능한 모든 시공간의 형태와 팽창 역사를 확률진폭으로서 거쳐왔다. 고전적 우주론(상향식 우주론)은 우주가 단 하나의 결정론적 궤적을 따라 진화했다고 믿었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여러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듯 우주 또한 무수히 많은 가능한 역사를 겪은 상태로 중첩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기존의 상향식(bottom-up) 우주론이 마주했던 심각한 딜레마, 미세조정 문제(fine-tuning problem)가 해결된다. 중력의 세기, 전자의 질량, 우주 팽창 속도 등 물리 상수들이 지금보다 아주 조금만 달랐어도 별이 형성되지 않거나 원자가 붕괴하여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상향식 우주론에서는 빅뱅 순간의 초기 조건이 로또를 연속으로 맞추는 수준의 기적적인 확률로 정밀하게 세팅되어 지금의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향식 우주론에서는 초기 조건이 특별할 필요가 없다. 빅뱅 직후에는 생명체가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물리 법칙을 가진 수많은 우주의 역사들도 파인만의 이상한 경로들처럼 진폭의 형태로 중첩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관측자(우리)가 우주를 관측하고 있다는 현재의 확정된 사실이 사후 선별의 기준점이 된다. 거울의 엉뚱한 위치를 거치는 빛의 경로들이 반대 위상과 만나 상쇄되듯, 현재의 우주적 조건과 양립할 수 없는 궤적(역사)들은 소거된다. 오직 지금의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조건의 역사들만이 유의미한 진폭으로 살아남아 서로 보강 간섭을 일으키고, 지금 우리가 보는 최종 화살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지연 선택 양자 지우개 실험을 우주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출기에서 얻어낸 아이들러 광자의 경로 정보 유무(현재의 조건)를 기준으로 D0의 밋밋한 전체 데이터 속에서 숨어있던 간섭 무늬(특정 역사)를 사후 선별해 낸 것과 완전히 동일한 논리다. 138억 년 전 우주가 어떤 경로로 진화할지 그 당시부터 미리 단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138억 년이 지난 지금 생명체라는 관찰자가 우주와 상호작용하는 그 순간의 조건들이 수많은 과거의 중첩 중 특정한 부분집합을 뽑아내어 지금의 우주를 구성한다. 우리가 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행위 자체가 중첩되어 있던 수많은 가능성의 과거 중 하나를 현재와 얽히게 만들어 확정된 실재로 끌어내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관계론적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주라는 거대한 시스템 역시 절대적이고 독립된 역사적 궤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호작용하는 두 전자가 서로에게 관찰자가 되어 실재를 확정 짓듯, 거시적 관찰자인 우리와 우주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찰나에 그물망 같은 관계 안에서 상대적인 실재를 이룬다. 양자 결어긋남을 통해 끊임없이 우주의 상태가 갈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명확한 최종 상태(결과)가 주어졌기에 그 수많은 갈래의 가능성들은 우리가 속한 단 하나의 물리적 역사로 정렬될 수 있다. 스티븐 호킹의 하향식 우주론은 우리가 거대한 우주에 던져진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양자역학적인 사후 선별을 통해 138억 년 전 빅뱅부터 시작된 가능성들의 중첩 속에서 지금의 우주 역사를 결정지은 가장 결정적인 '참여자'임을 시사한다(참여론적 우주론(Participatory Anthropic Principle)-존 아치볼드 휠러가 제안한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