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낯설어진다. 매일 보던 사람도, 매일 지나다니던 출근길도, 대대 건물도, 부대 풍경도. 마치 깊은 잠에 들어 긴 꿈을 꾸고있던 와중, 큰 소리에 화들짝 깨어나버린 것처럼, 갑자기 모든 것들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한껏 모은 휴가를 말출휴가로 한꺼번에 신청하던 날이 있다. 분명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휴가 신청인데, 분명 그럴텐데, 무언가 말로 표현 못할 기분이 느껴졌다.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던 사무실의 책상, 사물함, 휴가 신청을 하고 있던 노트북까지 모든 것이 곧 뭉게뭉게 사라져버릴 것 같은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치 학교 졸업식 날 졸업식을 마치고, 아무도 없이 노을빛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바닥을 아른거리는 교실에 살짝 들렀을 때의 느낌. 말로만 이제 마지막이라느니, 집에 먼저 간다느니 해놓고, 정작 내 무의식은 전혀 그렇지 않았었나보다.
총 638일.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내가 왜 이렇게 군대를 급하게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거의 나는 자기 손으로 군대를 지원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텐데. 기숙사에서 입대 계획을 짜던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하지만 지금 보면 아주 좋은 결정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공군 지원도 뺑뺑이가 되어 잘못하면 본2 때 공군을 떨어지고 입대 시기를 놓쳤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어떻게 운이 좋아 위아래로 좋은 선임과 후임만 있어 같은 공군의 다른 기수에 비해서도 이 이상 더 바랄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 속에서,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워나갔다. 군대는 작은 사회라고들 하지 않나.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그렇게나 어필하고 싶었을까, 군대는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려 하였다.
불완전함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군대에서는 특히, 배우려면 누구나 배울만한 것이었다. 나의 불완전함과 외부 환경의 불완전함을 격하지 않은 감정으로 대할 줄 아는 여유, 여유가 생기면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인지심을 배웠다.
당장에는 불편하고 힘들다 생각할 수 있어도 이런 작은 일들이 쌓여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자신감이 되어가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일이 쌓여 힘들어하는 다른 친구를 내 능력껏 도와주는 법, 남들이 조금은 귀찮아하는 것들을 솔선수범하는 법, 그런 것들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야, 그 모든 것들을 배우고 나서야 내 과거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자신이 없었을까.
정말 아깝고, 아깝다. 지나간 시간동안, 내가 할 수도 있었던 선택들이. 그 무수한 선택들, 개중에는 내 삶을 훨씬 풍요롭게 해줄만한 것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러는 한 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선택지를 선택해서 만들어진 지금의 나를 긍정하는 마음도 공존한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인생을 다채롭게 만들어 줄 선택지를 보는 눈이 길러지고 있는 나를 통해, 즐겁고, 다채롭고,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미래의 나를, 아주 많이, 고대한다.
군대는,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그래. 작은 인생이었다.
잘 놀다가, 참으로 잘 살다가, 867기는 이만 먼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