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카이스트에서 3학년 1학기를 다닐 때 코로나가 터졌다. 대부분의 수업은 온라인으로 대체되었고 나는 집으로 내려와서 수업을 들었다.
나에게 코로나 시기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정해진 커리큘럼을 의심없이 달려가던 중에 주어진 고립의 시기는 전산학부를 졸업한 후의 미래와 재수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쉼표가 되어주었다.
UN 인권위원인 저자 또한 초창기 코로나에 걸렸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신념처럼 받들던 인권의 의미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 개인의 인권과 다수의 안전이라는 공공의 이익이 충돌하는 그 사이에 서서 현실을 고려할 줄 아는 진정한 인권위원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나는 코로나 백신의 접종을 망설였었다. 당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개발된 백신에 대한 안정성 에 의문이 들었고, 백신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문제가 생겨도 국가가 온전히 구제해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백신접종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그런데 정부에서 QR 패스를 도입해 백신 미접종자는 사실상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졌고, 반강제적으로 백신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백신으로 인한 잠재적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고 만에 하나 나에게 그 위험이 현실이 된다면 누가 책임져줄 수 있는것도 아니지 않은가?
재수를 하던 와중이라 밖을 거의 나가지 않던 나에게도 이런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수많은 직장인들과 자영업자들은 오죽했을까 싶다.
펜데믹 초기에 발생한 인권 침해의 가장 어두운 부분은 확진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였다. 초기의 확진자들은 사회속에서 중대한 죄인이었다. 확진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코로나에 걸린 후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역학조사 결과 자신으로부터 옮은 사람 여럿이 죽었거나 중환자실에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중들은 확진자가 일부러 퍼트리고 다닌 양 비난을 쏟아냈고 확진자들은 졸지에 연쇄살인범이 되어버렸다. 그들 중에는 죄책감과 사회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역학조사 시스템에 의한 사생활 침해가 있다. 확진자는 역학조사라는 명분으로 모든 동선과 사생활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대중은 그걸 보며 마녀사냥을 즐겼다. 불륜코스라면서 걸릴만 했다 라던가, 집과 회사만 다닌 불쌍한 사람이라던가 하면서 말이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는데에 이정도로 상세한 개인정보 공개가 필요했을까? 단지 행정 편의주의에 빠져, 개인의 인권에 대한 세심한 고민 없이 일처리를 쉽고 빠르게 하고자 마구잡이로 데이터를 수집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정부가 인권만을 고수하며 개인의 자유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코로나 피해자가 나왔을 것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에 더욱 어려운 난제로 다가온다. 인권과 공공이익이 충돌할 때, 우리는 끊임없는 사회적 토론과 합의 속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펜데믹 사태에서 보인 해당 딜레마는 최근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의정갈등 속 의사파업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다.
의사의 노동자로서 파업권과 환자 치료라는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의사 뿐만 아니라 어느 단체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건강한 사회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무거운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그들 또한 사람이므로 오랜시간 노력하고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바랄 수 있다. 그럼에도 환자 치료라는 사회적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공인이라는 말을 덮어씌우면서 무한한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요구한다. 의사에게도 끝없이 선하고 이타적일 것을 요구하면서 만인을 위한 봉사자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의사 또한 노동권과 파업권을 가진 노동자임을 잊으면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이 때로 이기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비난만 하기보다, 그들이 노동자로서 추구하는 이기심 역시 합리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물론 그러한 사회적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의사들 또한 대중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문서와 sns 뒤에서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에서 벗어나 왜 지금 이 시점에 이러한 방식의 집단행동이 불가피했는지에 대한 진정성을 대중의 옆에서 설득력 있게 끝까지 전달해야 한다.
백신 접종을 망설이던 나, 확진자라는 사회적 낙인에 고통받던 사람들, 그리고 파업에 나선 의사들과 피해를 보는 환자들. 이 모든 풍경의 이면에는 인권과 공공이익이라는 두 가치의 팽팽한 줄타기가 숨어있다. 특정 가치의 희생을 당연시하거나 대화를 거부하는 대신, 우리는 끊임없이 토론하며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 과정이 더디고 힘들겠지만, 그러한 사회적 토론의 총량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더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2020년, 카이스트에서 3학년 1학기를 다닐 때 코로나가 터졌다. 대부분의 수업은 온라인으로 대체되었고 나는 집으로 내려와서 수업을 들었다.
나에게 코로나 시기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정해진 커리큘럼을 의심없이 달려가던 중에 주어진 고립의 시기는 전산학부를 졸업한 후의 미래와 재수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쉼표가 되어주었다.
UN 인권위원인 저자 또한 초창기 코로나에 걸렸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신념처럼 받들던 인권의 의미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 개인의 인권과 다수의 안전이라는 공공의 이익이 충돌하는 그 사이에 서서 현실을 고려할 줄 아는 진정한 인권위원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나는 코로나 백신의 접종을 망설였었다. 당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개발된 백신에 대한 안정성 에 의문이 들었고, 백신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문제가 생겨도 국가가 온전히 구제해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백신접종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그런데 정부에서 QR 패스를 도입해 백신 미접종자는 사실상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졌고, 반강제적으로 백신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백신으로 인한 잠재적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고 만에 하나 나에게 그 위험이 현실이 된다면 누가 책임져줄 수 있는것도 아니지 않은가?
재수를 하던 와중이라 밖을 거의 나가지 않던 나에게도 이런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수많은 직장인들과 자영업자들은 오죽했을까 싶다.
펜데믹 초기에 발생한 인권 침해의 가장 어두운 부분은 확진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였다. 초기의 확진자들은 사회속에서 중대한 죄인이었다. 확진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코로나에 걸린 후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역학조사 결과 자신으로부터 옮은 사람 여럿이 죽었거나 중환자실에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중들은 확진자가 일부러 퍼트리고 다닌 양 비난을 쏟아냈고 확진자들은 졸지에 연쇄살인범이 되어버렸다. 그들 중에는 죄책감과 사회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역학조사 시스템에 의한 사생활 침해가 있다. 확진자는 역학조사라는 명분으로 모든 동선과 사생활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대중은 그걸 보며 마녀사냥을 즐겼다. 불륜코스라면서 걸릴만 했다 라던가, 집과 회사만 다닌 불쌍한 사람이라던가 하면서 말이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는데에 이정도로 상세한 개인정보 공개가 필요했을까? 단지 행정 편의주의에 빠져, 개인의 인권에 대한 세심한 고민 없이 일처리를 쉽고 빠르게 하고자 마구잡이로 데이터를 수집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정부가 인권만을 고수하며 개인의 자유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코로나 피해자가 나왔을 것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에 더욱 어려운 난제로 다가온다. 인권과 공공이익이 충돌할 때, 우리는 끊임없는 사회적 토론과 합의 속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펜데믹 사태에서 보인 해당 딜레마는 최근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의정갈등 속 의사파업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다.
의사의 노동자로서 파업권과 환자 치료라는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의사 뿐만 아니라 어느 단체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건강한 사회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무거운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그들 또한 사람이므로 오랜시간 노력하고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바랄 수 있다. 그럼에도 환자 치료라는 사회적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공인이라는 말을 덮어씌우면서 무한한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요구한다. 의사에게도 끝없이 선하고 이타적일 것을 요구하면서 만인을 위한 봉사자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의사 또한 노동권과 파업권을 가진 노동자임을 잊으면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이 때로 이기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비난만 하기보다, 그들이 노동자로서 추구하는 이기심 역시 합리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물론 그러한 사회적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의사들 또한 대중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문서와 sns 뒤에서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에서 벗어나 왜 지금 이 시점에 이러한 방식의 집단행동이 불가피했는지에 대한 진정성을 대중의 옆에서 설득력 있게 끝까지 전달해야 한다.
백신 접종을 망설이던 나, 확진자라는 사회적 낙인에 고통받던 사람들, 그리고 파업에 나선 의사들과 피해를 보는 환자들. 이 모든 풍경의 이면에는 인권과 공공이익이라는 두 가치의 팽팽한 줄타기가 숨어있다. 특정 가치의 희생을 당연시하거나 대화를 거부하는 대신, 우리는 끊임없이 토론하며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 과정이 더디고 힘들겠지만, 그러한 사회적 토론의 총량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더더욱 성숙해질 것이다.